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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수련의 제도와 상황|인술 파동 그 논리적 측면|대표집필 이해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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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근본 해결 못 본 파동>
▲수입된 제도와 현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수련의의 병원 이탈로 발단됐던 수련의 파동도 지난 11일 수련의들의 병원 복귀로 일단 매듭을 지었다. 물론 문제가 근본적인 해결을 본 것은 아니며 또 그 문제의 성격상 앞으로 상당한 시일을 두고 해결책이 모색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의사의 병원이탈·환자 포기라는 불행한 사태가 의대 교수들과 관계기관의 끈덕진 노력, 그리고 수련의들의 양심 있는 행동으로 더 이상 불행한 사태에 이르지 않고 가라앉은 것은 우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수련의 파동은 그 피동의 주체가 직접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며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일손을 멈추는 순간부터 사회에 미치는 영향 또한 심각하다는 점에서 소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수련의들이 택한 행동에 대해서도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그 평가는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의사를 이른바 전통적 「인술」의 시행자라고 보는 입장에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병원 이탈이라는 극한적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 수련의 제도가 지닌 허다한 모순과 수련의들의 고충에 동정하는 입양에서 그들이 택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어 서로 양극단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어느 입장을 취하든 이번 수련의 파동은 이른바 「인술」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이냐, 의사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이며, 일반대중에게는 아직도 낮선 수련의 제도라는 것이 무엇이며, 수입된 제도와 한국사회의 현실 사이에 어떠한 모순이 있느냐는 등등 많은 문제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올바른 평가를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순한 지위 아닌 인술>
▲「인술」의 근대적인 윤리토론 참가자의 한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과학으로 확립되기 이전의 「인술」로서의 의술과 근대 과학으로 확립된 이후의「인술」과는 이것을 엄연히 구별해야 한다.
이것이 혼동되는 데서 의사의 윤리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한계가 불분명해지는 이유가 있다.
현대의 의학은 현대과학의 어느 분야에 비해서도 장기간의 수련과 막대한 시설의 배경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단순히 의사 개개인의 호의와 자선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와 관련해서 서양과 동양에 있어서의 의사 및 의사 양성기관으로서의 의과대학기관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전통적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의사의 사회적 지위는 높은 것이 못 되었다. 그것은 사회계층 상으로는 중인의 세습적 직업이었으며 의사를 『모셔오너라』하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게 통용된 것은 최근의 일이오, 마치 하인을 부르듯 의사를 『불러오너라』하는 표현이 통용됐다는 사상만으로도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일부 일본인 통치시대의 한지의, 검정의 제도의 설치로 말미암아 의사를 단순한 기술자로 대우하며 또 최근에 와서도 이윤추구에만 몰두해 치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소수의 의수의 존재가 이따금 보도됨으로써 완전히 가셨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에 반해 서양에 있어서 의사는 법률가와 더불어 전문적 직업으로서의 최고의 역사를 자랑할 뿐만이 아니라 특히 수련의제도의 발상지인 미국의 의대교육은 의예과교육을 마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느니 만큼 이것을 학부교육이 아니라 대학원교육으로 간주하며 의사는 단순한 기술인이 아닌 최고의 지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따라서 의과대학교육을 마친「인턴」 및 「레지던트」들 이른바 수련의들은 결코 학생이 아니며 국가에 의해 이미 그 자격을 인정받은 독립된 의사로서 의과 견학에 있어 환자의 진료와 더불어 학생의 교육까지도 분담하는 교육자들인 것이다.
수련의라는 번역의 탓으로 나타나는 오해로 말미암아 수련의는 학생이라는 생각은 수련의 제도의 내용과 본질을 모르고 하는 발언에 지나지 않으며 수련의들은 그 지위에 상응한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덧붙여 서양 선진국가에서의 의·약의 분리가 의료보험제의 확립은 금전상의 문제 때문에 나타나는 의사 대 환자 사이의 마찰을 극소화시키고 의사에 대한 관념을 우리 사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하고 있다.

<수련의는 학생 아니다>
▲지성인으로서의 의사의 책임
또 다른 삼가자는 이와는 좀 다른 각도에서 이번 파동을 말한다. 우리가 미국영화를 볼 때 이따금 개척시대 서부도시에 의사가 나타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서부 개척도시에 등장하는 의사는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어떠한 어려움도 피하지 않는 이른바 「인술」의 시행자일 뿐만이 아니라 그 높은 인격과 따뜻한 인간애로써 그 고장 사람들의 인생의 안내자의, 상의역으로 모든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대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바꾸어 말해 의사는 의학적 지식의 소유자인 동시에 인간과 인간의 생명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구비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만일 이번 파동에 있어 보도된 대로 수련의들이 병원과 환자에 대한 『통고 없는 이탈』이 사실이었다면 우리가 인술의 전통적 개념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대적 의미에서 이해한다 치더라도 선뜻 설득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최고의 지식인으로서의 의사의 사상과 행위 일치를 발견하기 어려우며 또 그것은 환자 없는 의사나 환자 곁을 뗘난 의수는 이미 의수로서의 존재와 의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의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번 수련의 파동에 있어 수련의들이 제기했던 두개의 요구 조건을 생각해 볼 차례이다.
그 첫째 조건이었던 정당한 보수의 지급 요청에 대해서는 어느 모로 보나 이의의 여지가 없다. 도리어 수 3년 전까지만 해도 수련의들에 대한 수당이 연차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을 망정 불과 수천원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움 마저 금하지 못하게 된다.
수련의란 그 제도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듯 학생의 신분도 아니요, 「진료와 교육의 분담자로서 국가에 의해 의사자격을 인정받은 독립된 의사이며 의료 대학 학생교육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또 그들의 대 다수가 가정에 돌아가면 처자를 부양하는 책임을 가진 가장들이라는 점에서 상식을 벗어난 보수가 수련의 제도 도입이래 10년 이상을 계속되어왔다는데 그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우리사회의 여건 하에서 전문의양성의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수련의제도 도입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되는 의과대학 교수들이 제도의 도입에만 급했지 그 도입된 제도가 한국적 사양에 뿌리박는 사업에 소홀했다는 점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줄 안다. 물론 이번 수련의 파동을 취급하는데 있어 의대교수들의 밤낮을 가리지 않은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데 인색지 않지만 대학병원 운영상 최대 맹점의 하나였던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과거 10여 년 간 너무나 소극적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새삼스럽게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해도 단순한 제도의 도입이상으로 그것이 제대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의 노력이 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듣기에 수련의들의 요구조건은 단순한 대우 개선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라고도 한다. 따라서 그들의 대우 개선을 포함한 대학병원 운영의 합리적 해결이 교수와 수련의들의 공동의 노력과 협조에 의해 하루바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적공 못 따르는 대우>
▲요구조건과 사회적 사명
수련의들의 제2의 요구조건이라고 보도된 해외 여행 제한의 철폐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의가 있었다.
의대교육이 의예과 2년을 포함해 6년이라는 긴 세월인데다가 수련의 제도의 도입으로 다시 5년을 대학병원에서 보내야 하며 거기에 군복무 3년을 가산하면 독립하기까지 실로 10여년의 긴 세월을 요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 10년간의 수련과 복무를 마친 후에도 한국의 실정은 그 적공에 대응할 만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 받지 못하는 형편이라는 것도 주지된 사실이다.
일진일보하는 최신 지성의 습득을 위해 또는 그 적공에 알맞은 대우를 받기 위해서 해외여행을 희망하는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기본권리가 일개 장관의 훈령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는 더구나 찬성할 수 없다. 그러나 학생시대의 무의촌 순방의 경험을 통해 무의촌의 실정이 어떻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수련의들로서, 1년간의 봉사는 비록 그것이 개인적으로 상당한 학생이요 고통이라 할지라도 무의촌 수백만 주민들의 애끊는 간청이라고도 이해되어야 할 문제일 줄 안다.
또 그러한 봉사의 요구는 의사라는 직업에만 사회가 기대할 수 있는 특별한 요청이라는 점에서 인술의 개념의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학도에 부과된 시대적 사명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지금 확실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그 동기가 무엇이든 의대졸업생의 3분의 1내지는 태반이 미국으로 가고 있다고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그 대부분의 운영이 이루어지는 국립대학의 경우 결과적으로는 가난한 살림에 6년간이라는 의과대학 교육의 태반의 경비가 미국인을 위한 의사양성에 소비되고 있다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과학에는 국경이 없고 인술은 인종을 초월하는 것을 본질로 하지만 무의촌에서 병고에 신음하는 수백만 동포가 있다는 것은 보다 절실한 문제임을 부정할 수 없다. 1년간의 봉사는 금전의 문제를 뗘나 이것이야말로 의사의 윤리의 문제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최고 지식인으로서의 당위의 문제라 해서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현행 무의촌 해소책을 위한 제도에 많은 모순과 불비한 점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 모순점의 시정책을 제시하고 요구할 것이지 1년간의 봉사, 그 자체를 부정하고 그것을 병원과 환자의 곁을 뗘나는 구실과 조건으로 삼는다는 것은 현시점에 있어 한국 의학도의 취할 바 태도는 아닐 것이다.
한편 이번 파동을 대하는 정부 당국의 태도에 대해서도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이미 관계기관에서도 언명한바 있듯이 수련의 피동의원 인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년 내로 되풀이되어 나타났던 현상이며 수련의의 불만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는데도, 그 양본적 해결책은 회피한 채 그때 그때의 임시적 해결로 고비만 넘기는 것을 능사로 삼았었다.
더구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당국의 강경책이라 해서 기한부 사표수매라는 것을 내세워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려는 태도였다. 다행히 의대교수진의 중간 역할을 통해 양자 사이의 양식 있는 행동이 파국을 막았지만 우리가 정부에 바라는 것은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사태를 극한적 상황으로 몰아 넣는 처사는 취할 바 방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힘에 의한 대결이 문제해결을 위한 최선책이며 나만의 의견이 옳고 일보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는 태도가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 허용되지 않는 것과 똑같이 약자에 군림하는 강자의 태도로써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려는 사고도 금물이라 할 것이다.
환자를 뗘난 의사가 있을 수 없다는 의사 본래의 자세에 호소해서 대화를 통한 지식인의 양식 있는 행동을 촉구하는 여유 있는 자세야말로 오늘날 정부가 가질 근본적 자세인줄 안다. 일이 급해질수록 당황한 나머지 강경책을 내세운다는 것은 관료 독선의 단적인 표현이라 해서 과언이 아니며 이러한 독선적 태도가 언제나 문제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태로 빠지게 하는 것을 우리는 여러 차례 경험한 바 있었다.

<소홀해진 인간문제>
▲일반적인 병폐
이번 수련의 파동은 앞서의 사법부 파동과는 다른 의미에서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여러 가지 병폐와 난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한가지 절감되는 것은 외국제도의 수입이 우리사회에서 소화되고 정착되기에는 많은 노력과 끊임없는 협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한 제도가 한 사회에서 확립되어 제대로의 기능을 발휘하는데는 때로 수백년·수십 년의 시행 착오의 경로를 밟은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제도의 수입만으로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당장 제대로의 기능을 발휘한다고 착각하는 것 같이 어리석은 일은 없다.
새로운 제도는 수입했는데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의 사고와 행동은 아직도 낡은 제도의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수동의 제도에 있어서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둘째로 제도가 사람의 행동 사이의 격차에서 나타나는 골치 아픈 문제가 나올 때마다 빠지기 쉬운 과오는 골치 아프다는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 유일의 해결책이 당장 그 제도를 없애는데 있다는 주장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번 수련의 파동에 있어서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외국제도의 수입에는 반드시 골치 아픈 문제가 뒤따른다는 것은 그 본질상 부가피한 일이며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수입에 앞선 충분한 사전 연구와 도입 후의 마찰을 미연에 방지하는 만반의 대책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이러한 사전연구와 준비 없이 어떤 개인들의 즉흥적 기분이나 독점만으로 마치 호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 듯 제도의 수입과 기관의 남발이 거듭되어온 것을 우리는 또한 너무나 많이 보아 왔었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혼란의 한 원인도 바로 이러한 사실이 누적된 결과라 해서 과언은 아닐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혼란이 있을 때마다 관료의 탁상 논의로 제도의 개폐가 주장되는 무책임한 행동도 경계해야 한다.
이번 수련의문제만 하더라도 좋든 싫든 그것이 우리 나라 의료제도의 기간을 이루어 온지 이미 10여년이 경과했고 또 전문의양성의 필요성은 우리사회의 절실한 과제인 이상 그 개선책을 위해서는 우선 그 당사자인 대학 당국의 의견이 제일 존중되어야 한다.
관료의 목단만이 제도의 수입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제도의 정착화를 위해서도 만능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는 왔다고 본다.
끝으로 수련형 파동을 포함해 오늘날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를 관찰할 때 우리사회에서 인간의 문제를 생각하고 인간을 다루는데 있어 너무나 소홀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의 발전은 인간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지만 인간을 뗘난 경제의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경제의 발전은 인간을 위해 가장 중요하지만 그러나 하나의 방법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 혼란의 근원적 원인은 바로 이 목적과 수단의 혼동에 있다. 동시에 경제의 발전도 공장이 한두 개 더 생긴다는 데서 보다 더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나 자신과 나의 이웃과 나의 동포에 대한 정신자세에서 그 원동력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수련의 파동이 비단 의수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태도의 변화는 사람들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 비판으로써만 가능하며 이러한 자유로운 비만의 풍토를 만들어 주는 일차적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것도 또한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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