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시초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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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정치가는 누구나 두 가지 이상의 탈을 쓰고있다 한다. 그러니까 한 정치가가 사람들에게 안겨주고 있는 이미지는 여러 가지가 된다.
그의 경륜이 크거나, 활동범위가 클수록 그가 쓰고 있는 탈과 이미지도 여러 가지로 늘어나기 마련이다. 역사적 인물의 평가가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흐루시초프의 죽음은 이런 느낌을 더욱 짙게 해준다.
마지막에 남긴 이미지는 철저한 침묵 속에서 정원이나 가꾸면서 소일하던 쓸쓸하기 짝없는 연금생활자의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정에 이끌려서 사물을 판단하기 쉽다. 아무리 사납고 간사했던 인물에 대해서도 그의 비참한 말로를 보면 곧잘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게 민중의 생리다.
지금까지도 우리의 뇌리에 가장 생생하게 남아있는 「흐루시초프」는 미국 「아이오와」주에 있는 한 농장에서 옥수수를 까먹고있던 시골영감의 이미지다. 1961년 유엔총회에서 구두를 벗어 들고 책장을 두들기던 「흐루시초프」도 지금은 그저 우직한 영감의 애교로만 기억에 남았다. 「에드워드·케네디」까지도 『인류전체가 핵전쟁으로 멸망의 위협을 받던 때, 국가이익을 초월하여, 인류의 운명을 구하고 평화를 가져오게 했다』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프랑스의 슈만 외상도 그를 애도하면 인물』한 결론, 현실과는 유리된 결정들』을 내린 장본인으로서 역사에 해악을 끼친 인물이라고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면이 있었다. 그가 스탈린의 『충복』이 된 것은 30년대의 대숙청 때부터였다. 그리고 스탈린의 마지막 생일 축하할 때 「흐루시초프」의 눈물겨운 축하인사는 스탈린을 몹시 감동시켰다. 그런 그가 스탈린이 죽은 다음에는 그 격하운동의 선봉자가 되었던 것이다.
권력의 정상에 으르기까지의 그는 냉혹한 「매키어벨리스트」로서 잔인하고, 끈덕지고, 음흉한 실리주의자로서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점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으며 그의 영고는 바로 공산주의의 본질과 직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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