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심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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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잠시 영국의 얘기를 먼저 해야할 것 같다. 1947년11월12일에 일어난 일이다. 「애틀리」노동당내각의 「돌튼」장상은 재정연설을 하기 위해 「다우닝」가 11번지 공저를 떠나고 있었다. 이때에 신문기자들이 달려들어 질문을 했다.
『담뱃값도 오릅니까?』
『예스!』
이 한마디는 다음날 「돌튼」을 장상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영국에선 장상의 재정연설은 대단히 길어서 3, 4시간이나 걸리는 것이 상례이다. 그 동안 연설자는 무엇이든지 그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마실 수 있다. 이것은 특별허가에 속한다. 「디즈레일리」같은 사람은 「브랜디」와 「소다」수를 즐겨 마셨다. 「조지·J·고쉰」같은 장상은 포도주를 한 병이나 들이켜야했다. 「처칠」은 장상시절에 「위스키」를 마시며 유유자적하게 연설을 했다. 장상의 목이 타는 심정을 한편으로는 어루만져주는 것 같아서 절로 미소가 나온다.
「돌튼」장상이 그날 하원에서 특별예산에 관한 재정연설을 한창하고 있을 때, 석간신문에선 담뱃값 인상에 관한 얘기가 「헤들라인」을 장식했다. 의장 안에서는 단숨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예산은 무엇보다 우선해서 하원에 보고되어야 하는 것이 영국서는 헌법적인 관례로 되어있다. 바로 이 관행을 깨고, 외부에 먼저 터뜨린 것은 의회모욕이 아니냐고 의회의 비난이 빗발치듯했다.
야당이던 「처칠」보수당 당수는 즉시 위원회를 소집하고 사실조사를 요구했다. 「돌튼」은 다음날 의회에서 정중히 사과하고, 그날 저녁으로 사직해버렸다. 예산에 대한 정책은 우선 의회에서 차근차근 토론되어야 한다는 관례는 이래서 다시 위신을 찾게 되었다.
지금 묵은 얘기를 꺼내는 것은 바로 우리도 예산안심의를 위한 계절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야당은 야당대로, 여당은 여당대로 한껏 벼르고 있다. 물론 여야의 처지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서로들 무슨 전투태세라도 가다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국민들은 누구도 놀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산안은 무난히 통과될 것을 저마다 짐작하고있기 때문이다. 실로 서로가 멋적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개 8월 하순예산안이 슬금슬금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동시에 물가도 들먹거리기 시작한다. 세율은 예산과 함께 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정기국회가 끝날 무렵 그런 안들은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통과되고 만다. 달리 생각하면 우리나라에선 예산안이 먼저 발표됨으로써 공연히 실속도 없이 시정인 들만 심각해지고, 그러는 동안에 상당한 면역이 서로간에 되는 것 같다. 국회야말로 원님 지나간 뒤에 나팔 부는 격이 되고 만다. 이번 정기국회에선 과연 얼마나 진지하고 심각하게 그런 일들이 토론될지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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