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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4분」에 불 뿜은 취재 전|판문점「남-북 대좌」낙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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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단 4분 동안에 끝난 남북대화를 취재하기 위해 신문·방송 등 보도기관은 20일 하루동안 불 뿜는 열전을 벌였다. 26년만에 교환된 악수의 한 장면, 『안녕하십니까』하는 인사말 한마디를 보다 빨리 전하기 위해 판문점∼서울의 l백 리 길을 40분에 달리는 보도차량들의 결사적 질주, 누가 파견 원으로 가는가하여 처마 끝에서 밤을 세운 경찰기자들의 애환과 그날 못다 쓴 4분회동의 그늘에는 숱한 낙수가 뿌려졌다.

<담배도 못 피운 긴장>
팔도의 부름은 마침내 26년 동안 가로막혔던 남북의 장벽을 바늘귀만큼이나마 트고 말았다. 양측대표들도 짐짓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 애썼지만 누르기 힘든 감격과 긴장으로 신임장과 교환문서를 받아 쥔 손과 손이 떨리기도 했다. 얼마나 긴장됐던가는 공산 측이 갖다놓은 두 갑의 담배가 한 개비도 태워지지 않은 채 모두들 퇴장했을 때까지 그대로 탁자 위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도 짐작할 만하다.

<"여자가 왔 시 다래">
「긴장」과「대치」가 예상되는 앞으로의 예비회담 분위기를 위해서 대한적십자사 홍일점대표를 고른 것은 퍽 잘된 포석이었다는 중평.
『저런, 여자가 왔 시 다래』라면서 북괴기자들은 약간씩 놀란 표정이었으나『1천만 흩어진 가족의 절반이 여자가 아니겠어?』라는 우리기자들의 해석에 북괴 측도「모정의 대표로서의 여자대표 파견에 공감을 보 아기도 했는데 윤씨의 상냥한 미소에 4분간의 대좌는 한결 부드러웠던 게 사실-.

<분계선에 탁자 놓고>
문서 교환 장으로 쓰인 중립국감시위원회회의실의 준비를 위해 양측은 퍽 바빴었다. 회의실은「유엔」측 관할아래 있고 중립국감시위 사무실은 공산 측 관할아래 있었기 때문에 회의실준비는「유엔」측이 맡았는데 12명이 앉던 원탁을 치우고 정방형의 탁자를 군사분계선이 흐르는 증간에다 갖다놓고 기자들을 위해 양측유리창을 완전히 개방했으며 탁자 위엔 재떨이와 적십자 깃발이 놓였다. 군사정전위원회처럼 깃발 높이기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였든지 깃발높이를 똑같이 하는데 무척 신경을 쓴 것 같다.

<북괴, 현판 새로 달아>
북괴 측도 이번 남북적십자의 만남에 어지간히 흥분했던 듯-. 북괴가 올 봄에 개관한 큼직한 전시관에 판문각이란 현판을 처음으로 내걸고 기자들은 예나 다름없이「레닌」모를 썼으나 빠짐없이 김일성「배지」를 달고 흰 남방으로 통일한 옷차림으로 나와 북 적 위원 장 손성필이가 서명한 8·12 수락서신 복사한 것을 돌리며『이젠 마음놓고 좀 만나 봅시다』 라면서 극성을 피웠다.

<북괴기자 어 리 둥 절>
『적십자가 아니라 기자 잔치 날 같다』란「조크」가 나올 이만큼 남북·내외기자들이 설치는 통에 야트막한 회의장 건물 안은 북새질을 쳤는데 엄격한 출입제한을 했던「풀」제가 무너지고 기자들이 마구 회의장안에 밀어닥쳐 아우성을 치자 자유세계 기자들의 취재경쟁을 처음 본(?) 북괴기자들은『여보, 오늘 같이 경사스러운 날에 이게 웬 짓들이오』라고 어이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기자들 체포됐다고>
판문점공동경비구역을 미군이 맡고있는 관계로 임진강으로부터 전진기지와 판문점까지 경비를 미군이 맡아주었으나 기자들의 수송「버스」는 2대의 대한여행사·「버스」, 대표들의 승용차도 서울 자「세단」, 그리고 안내 장교도 한국군연락장교단장 심재룡 대령이 맡는 등 우리의 주체성이 어느 때보다 돋보였다. 사진 촬영 금지구역으로 되어 있는『임진강 어귀에서 기자 6명이 체포됐다』는 발표가 있어 어리둥절했는데 알고 본즉 모 방송 중계 반이 새벽부터 나와 극성을 피우다 제지를 받고 물러났던 것이 그렇게 와전됐다.

<외신기자도 20여명>
남-북 접촉의 현장인 판문점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외신기자 20여명은 최신장비를 동원, 취재경쟁을 벌였다. CBS의「블룸」기자는 역사적인 20일 대면기사의 첫 대문에『이것은 다만「시작의 시작」과도 같은 모임이나 26년만의 만남이다』고 송 고했다.
가장 궁금한 것이 누가 파견 원으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김학묵 사무총장이나 김호진 공보부장이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대부분 생각했지만 김 공보부장이 18일 께 부 터 자꾸「파견 원」이라고 강조하는 점에서 사무총장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다 격이 낮다면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김 공보부장과 윤여훈 섭외참사의 두 사람으로 짐작하고 19일 밤「프로필」을 준비했지만 서무부장 이창렬씨 인줄은 몰라 둘 중 한사람은 빗나가 버렸다. 19일 밤 경찰기자들을 김 사무총장 댁, 김 공보부장 댁, 윤 참사 댁에 배치했고 모 기자는 윤 참사 댁을 방문, 무려 2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했지만 윤 참사는『댁의 신문사의 S논설위원이 파견된다던데-』하고 딴전을 부려 연막을 폈지만 제대로 짚어 사진까지 미리 준비했던 것.

<자유다리 보고 싶어>
30여대의 보도차량과 1백여 명의 보도진이 몰려 취재경쟁을 벌여 살벌한(?) 분위기마저 감돌았으나 전남 곡성군 오곡 면 묘천리에서 왔다는 신덕례 여인(39)이『남-북 가족 찾기 운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자유의 다리」를 건너 북한 땅에 가보고 싶다』고 엉뚱한 말을 해 한동안 긴장감을 풀어주기도 했다.
흥남이 고향이라는 김봉구씨(50·서울 종로구모원동260)씨는 서울 자3-6243「피아트」로 「자유의 다리」앞까지 왔는데 1·4후퇴 때 부모·형제를 두고 남하, 현재 동대문시장에서 강사를 하고 있다면서『역사적인 순간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서 목격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른 아침부터 장사 일을 쉬고 이곳으로 왔다는 것.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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