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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m 지하에 펼쳐진 21세기 역바벨탑 "이곳선 물리학이 공통 언어이자 종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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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신의 입자’라는 힉스 입자의 존재를 확인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둘레만 27㎞인 세계 최대 규모의 대형강입자가속기(LHC)를 보유한 CERN의 내부를 직접 들여다봤다.

지하 100m에 위치한 대형강입자가속기(LHC)의 CMS 입자검출기를 한국 취재진이 살펴보고 있다. [제네바=강찬수 기자]

24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20여㎞ 떨어진 머랭 지역의 한적한 도로에 들어서자 커다란 공 모양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홍보관이었다. 도로 맞은편에는 CERN의 운영에 참여하고 있는 유럽 20개 회원국 국기가 게양된 CERN 본부 건물이 서 있었다.

CERN의 자랑은 땅속 100m 깊이에 둘레 27㎞, 지름 3.5m의 원형 터널을 뚫고 설치한 대형강입자가속기(LHC)다. 세계 최대 규모다. 특히 올해 피터 힉스 영국 에든버러대 명예교수와 프랑수아 앙글레르 벨기에 브뤼셀자유대학 명예교수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CERN에 관심이 집중됐다. 두 사람은 64년 ‘신의 입자’로 불리는 힉스 입자의 존재를 예견했고, CERN은 지난해와 올해 이 LHC를 활용해 힉스 입자의 존재를 확인했다.

힉스입자 발견엔 3000여 명 참여

CERN이 직접 노벨 물리학상을 받지 못한 게 서운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CERN의 루디거 보스 국제협력단장은 “힉스 입자 발견에 참여한 CERN의 연구원이 3000여 명이나 돼 이들에게 노벨상을 주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을 것”이라며 “노벨상위원회가 수상자를 발표하면서 CERN을 거명해 상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LHC를 둘러보기 위해 국경 너머 프랑스 지역을 향해 자동차로 다시 20분 정도 이동했다. CERN의 본부는 스위스에 있지만 LHC 대부분은 프랑스 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LHC는 최근 가속기 성능을 높이는 작업을 위해 가동을 중단한 상태여서 취재진은 지하 100m 아래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70초가량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지하 깊은 곳에는 높이와 폭이 각 18m, 길이가 100m가 넘는 ‘콤팩트 뮤온 솔레노이드(CMS)’ 구조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CMS는 가속기 관을 빛에 가까운 속도로 지나는 입자들을 찾아내는 LHC의 검출기다.

1경분의 1㎝ 입자도 잡아내

 구조물 내부에는 지름 15m, 무게 1만4000t의 원통형 검출장치가 가속기 관을 파인애플 모양으로 감싸고 있었다. 검출장치에는 양성자 충돌 후 사방으로 흩어지는 입자들을 추적하는 커다란 자석과 센서, 전자장치, 전선이 복잡하게 연결돼 있었다.

 취재진을 안내한 CMS 연구팀의 장성현(강원대 소속) 박사는 “두 개의 관으로 양성자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속한 다음 관을 합쳐 충돌시키고, 충돌에서 쪼개져 나온 입자들을 검출한다”고 말했다. 1경(京)분의 1㎝ 크기로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작은 입자를 확인하는 거대한 현미경(super-microscope)인 셈이다. LHC가 가동될 때는 마찰열을 식히기 위해 액체 헬륨으로 온도를 영하 271.35도까지 낮춘다. 우주에서 가장 낮은 온도란 게 CERN 측의 설명이다.

 2008년 완공된 LHC는 개선작업이 끝나는 2~3년 뒤에는 양성자 가속 에너지가 지금의 7TeV(테라일렉트론볼트)에서 14TeV로 높아진다. CERN의 루디거 보스 국제협력단장은 “더 큰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면 보다 높은 밀도를 가진 입자를 빛에 근접한 속도로 충돌시킬 수 있어 우주 탄생의 비밀을 푸는 데 한발 더 다가설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가속기는 성능 개선 작업 중

 이제 겨우 존재 자체를 확인한 힉스 입자의 구체적인 특성을 밝히는 연구도 가능할 전망이다. 장 박사는 “LHC의 시설 개선을 통해 앞으로 힉스 외에 새로운 입자를 발견할 가능성도 있다”며 “이를 통해 입자 표준 모델을 보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우주의 암흑물질을 규명하는 데도 LHC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 가운데 95%는 아직 인류가 파악도 하지 못하고 있어 암흑물질로 불린다.

 CERN은 유럽 국가들이 설립한 곳이지만 전 세계 과학자가 협업을 하고 있는 곳이다. 연구와 실험이 한창 진행되던 올 1월에는 20개 회원국의 연구원 6000여 명을 포함해 전 세계 60여 개국 1만여 명의 연구자가 함께 일했다. 한국도 12개 대학·연구소 소속 과학자 69명이 연구에 참여했다. CERN의 지식이전 부문 책임자(코디네이터)인 장 마리 르 고프는 “CERN의 LHC 운영 과정은 바벨탑 이야기(교만한 인간에게 신이 다른 언어를 쓰게 함)와는 정반대다. 이스라엘과 아랍 사람이 한 실험실에서 평화롭게 일하는 이곳에선 물리학이 곧 공통의 언어이자 종교”라고 말했다.

한국 포함 60개국 1만여 명 작업

 엄청난 규모의 연구기기와 연구진 못지않게 이곳에서 나오는 자료도 방대하다. LHC가 가동될 때 검출기에서 나오는 데이터는 초당 300MB(메가바이트)가 넘는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보관하는 일도 간단하지 않지만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은 수퍼컴퓨터로도 벅찬 일이다. 검출기에서 나오는 데이터는 일단 CERN이 보관하지만 전 세계 공동연구팀에 보내 지역별로 수퍼컴퓨터를 활용해 공동 분석한다. 인터넷 서비스인 월드와이드웹(WWW)이 89년 이곳 CERN에서 탄생한 것도 데이터를 공유하고 함께 분석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제네바=강찬수 기자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1954년 스위스 제네바에 설립. 현재 유럽 20개국이 회원국으로 돼 있으며, 회원후보·준회원·가입신청국·옵서버 등으로 15개국이 있다. 대형강입자가속기(LHC)를 포함 7개의 가속기를 보유하고 있다.

◆대형강입자가속기(LHC)=스위스-프랑스 국경지역 땅속 100m에 설치된 둘레 27㎞의 대형 원형 가속기. 양성자나 납(Pb) 이온을 진공 상태인 지름 5㎝ 가속기 관 속에서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하고 충돌시키는 장치다. 양성자는 이 가속기 관에서 초당 1만1246번 회전한다.

◆CMS=LHC 속의 양성자를 충돌시키고, 그 결과 생성되는 입자를 살펴보는 대형 검출기. 거대한 열량계와 전자석 등으로 구성돼 있다. 큰 빌딩 속에 들어 있는 검출기 자체는 지름 15m에 길이 21m의 원통형이며, 무게만 1만4000t에 이른다. 200~2000t 규모의 조각을 100m 지하로 내려보내 조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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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잡습니다 위 기사에 대형강입자가속기(LHC)의 가동 시 온도가 영하 271.35도로 우주에서 가장 낮다는 CERN 측의 설명을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미 항공우주국(NASA)의 국제천문학팀은 지난 25일(현지시간) 홈페이지를 통해 칠레 알마전파망원경을 통해 관측한 결과 ‘부메랑 성운’의 온도가 영하 272도이며 이곳이 우주에서 가장 온도가 낮은 곳이라고 밝혔습니다.

'신의 입자' 힉스 발견한 CERN 르포
세계 최대 규모 가속기·검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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