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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제자는 필자>|<제14화>무역…8·15 전후 (5)|전택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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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선 무역 협회>
만주 사변 후, 그러니까 한반도에 이어 무대를 대륙으로 옮기면서 일본은 조선 무역 협회를 설립했다.
합방 직후에 생긴 경성상공회의소가 주동이 돼서 1933년4월 당시 한국에 와있던 일계 무역 회사들로 발족한 조선 무역 협회는 지금의 대한상공회의소 자리에 있던 경성상공회의소 안에 사무실을 두었다.
이 협회는 사단 법인으로서 형식상 임의단체였으나 실장은 조선 총독부, 그리고 본국 정부의 시책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인만의 관제·어용 단체였으며 따라서 회장에는 으례 조선은행총재가 선임되고 그 밖의 임원도 모두 일본인 일색이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몇몇 사무 직원으로 있었다고 하나 기억에 없고 훨씬 후인 1941년에 이 협회 업무의 일부를 넘기기 위해 설립한 조선 동아 무역 주식회사에 보전 출신의 정인철(작고), 그리고 이름이 기억 안 나는 이모 (광주에 살고 있다는 소문), 서모 (납북) 등의 한국인 직원이 있었다고 한다.
앞에 얘기한대로 역대회장직을 조선 은행 총재가 맡았기 때문에 초대에 「가또」(가등경삼랑·33년4월∼37년12월), 2대에 「마쓰하라」(송원순일·37년12월∼43년1월), 3대에 「다나까」(전중철삼랑·43년3월∼)총재가 회장으로 있었다.
조선 무역 협회의 사명은 원래 대 만주 수출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농공 병진 정책을 펴기 시작한 일본은 기왕에 수출하던 해산물 외에 한국에서 새로 생산되기 시작한 각종 면직물과 고무 제품, 화학 비료, 「시멘트」등 공업 제품의 대만 수출을 촉진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으며 그것은 얼마 후 지나 사변으로 이어진 군사 전략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봉천·안동·신경·「하르빈」·대련 등 만주 각지에 출장소 또는 지점을 설치하고 해마다 적당한 곳을 골라 소위 「조선 물산 선전 전시회」니 「견본시」를 열어 거래 알선을 했으며 지나 사변 후에는 상해·모단장·청도 등지에도 출장소를 개설, 북지 무역의 전초 기지로 삼았다.
협회의 임무는 대 만주 또는 대 북지 수출 촉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만주에서 잡곡류 같은 것을 수입하고 필요한 물자를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져가는 일도 도왔다. 만주서 가져오는 잡곡류 중 콩을 제외하고는 대개 한국에서 소비시켰으며 그 대신 한국쌀은 콩과 함께 일본으로 수출되는 인기 품목이었다.
특히 콩을 비롯해서 소와 소가죽 등은 당시 원산·성진에서 대량으로 건너갔는데 원산항에는 이런 물자 반출을 위한 특별 부두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일본인들로 된 무역 단체로 조선 무역 협회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고 활약하고 있었는데 반해 우리 나라 사람들로 된 것은 없었다. 무역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의 수효가 워낙 적었던 데다가 대부분이 영세했고 또 총독부 당국의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소속해있던 서호진 수산물 수출 조합 같은 것이 주요 산지별로 여럿 있어서 조합 명의로 수출을 했으며 그 결과 뒤에 총독부가 무역을 전면 통제하면서 엄격한 허가제를 실시했을 때 과거 실적에 준해서 수출 「코터」를 받을 수 있었다.
성격상 조선 무역 협회와는 비교할 수 없고 경성상공회의소에 대비되는 단체였으나 앞서 공익사와 관련해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는 경성상공협회가 당시 우리 나라 사람만의 경제 단체치고는 그래도 비교적 큼직한 것이었다.
회원 중에는 줄곧 회장직을 지낸 박승직씨를 비릇, 박흥식씨등 무역 업계 인사들이 끼여있었으며 그런 점에서 지금의 상공회의소와 비슷하다. 그러나 물론 아무 실권이나 당국의 뒷받침이 없는 단순한 친목 단체였다.
아뭏든 상공협회의 핵심은 역시 포목상 아니면 규모가 큰 잡화상을 하던 당대의 장안거상들이었으며 앞에 말한 최인성 김희준 최남 허택 신덕현씨 말고도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태응선 (포목상) 김규면 (포목상) 윤우식 (잡화상) 양재창 (상업) 변상호 (직물상) 그리고 지금도 생존해 있는 홍창유 (양복점·문학 평론가 홍사중씨의 엄친) 박용하 (당시 상업·전 서울상대학장)씨 등이 회원으로 있었던 기억이 난다.
1919년에 창립된 이 협회는 꽤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이듬해 봄인 1942년 초 강제 해산 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나기 1년 전 조선 무역 협회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일본이 독·이와 함께 주축국을 형성하고 참전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서자 미·영 등 연합국의 경제 제재는 강화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일본은 내지와 한반도, 그리고 만주·지나 일대 소위 원성의 자급 자족적 경제 정책을 펴지 않으면 안됐다.
그에 따라 무역을 전면 통제하는 조치가 취해졌으며 무역 협회는 1941년 초 조선 무역 진흥과 조선 동아 무역의 2개 사를 차례로 설립, 종래 협회가 맡았던 거래 알선 업무는 말할 것 없고 총독부에 대신해서 수출입을 허가하고 직접 수출입 행위를 할 수 있게 했다.
종래 총독부는 앞에 설명한 우리 나라 사람들만의 조합과는 성격이 다른 각종 관제 조합을 만들고 이들을 수출 조정 기관으로 활용했었는데 전기한 2회사가 신설됨을 계기로 단순한 보조 기구로 전력했으며 만주를 포함한 중국 대륙과의 거래는 조선 동아 무역이, 「버마」태국 「인도차이나」「인도네시아」등의 「남방무역」은 조선 무역 진흥이 관장케 했다. 동시에 무역 협회는 그 뒤 단순한 조사 업무만을 맡게 되었는데 창립 10주년 기념 사업으로 1943년 조선 무역사를 편찬, 그중 1권이 현 한국 무역 협회 도서실에 소장돼 있다.

<고침=작일자 본란 「무역…8·15전후」③은 ④의 잘못이며 연 번호도 195로 고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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