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작가|6·25 스물 한 돌을 맞아|홍은중<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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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뭣인가를 모두 잃었다. 집을, 가족을, 또는 마음의 한 부분을 잃었다. 이런 전쟁을 우리는 잊어가며 있는 것 같다. 엊그제 한국 동란을 다룬 어느 「텔리비젼」 좌담회에서 사회자는 한국전쟁이 계기가 되어 엄청난 발전을 우리가 이룩할 수 있었다는 말까지 했다. 전쟁의「이미지」도 세월을 따라 엄청나게 달라진 모양이다. 손창섭·오향원·서기원·이호철들이 그렸던 전쟁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오늘의 세대는 갖고있는 모양이다. 무리 없는 얘기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등에 업혀 피난 갔던 철부지 어린이가 어느새 30대가 됐다. 전쟁 때 태어난 어린이도 이젠 21세다.
전쟁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그 만큼 늘어난 것이다. 체험하지 못한 오늘의 젊은 작가들이 전쟁을 그리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체험이 있어야만 전쟁을 그릴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헤밍웨이」 나 「노먼·메일러」나 모두 체험을 통해서 전쟁소설들을 쓰기는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휴전과 함께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뻐끔히 뚫어놓은 빈터는 고층 「빌딩」과 고속도로만으로 메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전쟁이 단순히 현장에서의 체험만으로는 쓰지 못한다는 이유도 이런데 있을 것이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죽이고 한다. 그리고 모든 게 파괴된다. 모든 가치가, 그리고 사회의 기틀이 붕괴된다. 특히 한국전쟁의 경우 그랬다. 이런 속에서 붕괴되어 가는 인간의 표정 또한 전쟁의 한 모습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한국전쟁의 참 모습은 밝혀지지 않는다.
작가는 언제나 초점을 인간에 두게 마련이다. 아무리 전쟁을 다룬다 하더라도 역시 전쟁 속에서 시름하는 인간에 초점이 두어진다. 작가는 사회학자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같은 인간의 시름도 전쟁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시름하는 인간을 보다 투철하게 파들어 가면 갈수록 전쟁의 모습과 성격도 자연히 나타나게 된다. 동시에 전쟁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을 때 그 속에서 싸우는 인간의 표현도 더 풍부해진다고 할 수 있게된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수많은 작품이 나왔으면서도 아직도 그 온 모습을 그려낸 것이 없었다는 데에는 한두 가지의 원인만이 있는 것 같지 않다.
한동안 너무나도 생생한 체험을 작품화하는데는 상당한 시기의 냉각이 있어야 한다고 자위하기도 했다.
실제로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쓴 것은 전쟁이 끝난 지 60년 후의 일이었다. 「헤밍웨이」도 당장에 『무기여 잘 있거라』를 쓴 것은 아니었다.
이런 자위의 시기도 이제는 지났다. 생생한 감동이 식어 이제는 오히려 기억에서 사라져가며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참모습과 성격을 제대로 사회과학자들이 구명해내지 못했다는데도 까닭은 있다. 이점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체험을 추상화시키는 작업에 작가들이 게을렀던 게 아닌가 여기게된다. 한국전쟁에는 어느 전쟁에나 공통적인 면이 있다. 가장 반인간적인 게 전쟁이면서도 가장 고귀한 「휴머니즘」의 소리가 들리는 것도 전장이다. 살인과 파괴의 심리와 함께 희생의 정신이 발휘되고 사람이 「이름」대신에 「개표」로 불리는 조직 속에서 엄청난 영웅성이 작용하기도 한다. 이런 전쟁의 이율배반성은 한국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이율배반성 중에서 하나에만 치중했던 게 지금까지의 작품들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게 좀더 정확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국군은 「터부」였다는데도 까닭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갖고있는 특수성이 또 그렇게 만들어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전쟁은 적어도 싸우는 시민의 입장에서는 두기로 나눠진다. 처음에는 내 집과 생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한다는 결의가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 망설임도 회의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전쟁을 구실로 한 부패와 부정과 반민주적 경향은 늘어만 갔다. 차차 누구를 위한 싸움이냐는 회의가 들먹이게 되었다. 이게 제2기였다.
이런 제2기를 작가들은 제대로 파헤쳐 나가지 못했다. 작가에게는 다시없는 제약이 아닐 수 없었다. 제약은 그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쟁은 언제나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놓는다. 아군이 아니면 모두 적군이 된다. 그러나 그 「적」의 탈을 벗기면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인간상이 들어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참다운 비극성은 서로 적·아로 갈라질 수 없는 동족끼리 싸워야했다는데 만 있던 게 아니었다. 아군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여겨야만 했다는 데에도 있었다. 그리고 작가에게 있어서는 적이 아니면 모두 씩씩하고 자랑스러운 아군으로 여겨야만 했고 아군이 아니면 모두 가증한 비인간적인 적으로 그려야만 했었다는 데서 슬픔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결국. 보다 더 훌륭한 작가가 나오기를 한국전쟁은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에 앞서 무엇에도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좋을 상황을 훌륭한 작가와 작품은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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