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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목포∼서울중앙 대 역전경기|코스 따라 산천 따라(5)-안성천 지나 평택평야…모심기 한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호도과자 사유!』아낙네들이 천안명물 호도과자를 팔고 있는 버스 주차장에서 동쪽 60릿 길에 3·1운동 때 일제에 항거,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순국한 애국소녀 유관순양의 비가 서있다.
이 비는 유양의 생가 터인 천원군 동면 용두리에 세워졌으며 유양이 독립만세의 봉화를 올렸던 병천면 병천리에도 3·1운동 기념비가 있어『이 나라에 태어난 자 이곳을 무심코 지나칠 수 없다.』경부 고속도로 천안·「인터체인지」를 오른쪽에 보며 천안∼서울 2백60여릿 길을 들어서 30리쯤 북상하면 참외의 고장 성환면.
성환 참외는 한 여름철 향기와 단맛, 속 빛깔이 고와 구미를 돋우는 천하일품으로 예부터 너무나 유명했다. 그러나 최근 단작이기 때문에 수익성이 낮아 농민들이 재배를 기피, 오랜 전통을 지닌 성환 참외의 맛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지금은 직산에서 시험 재배를 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충남과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는 안성천을 넘어서면 곳곳에 모심기하는 모습이 두드러진 는 사이로 아스팔트 길이 북으로 치닫는다. 엷게 펼쳐진 평택 평야의 서쪽 끝은 아산제-바다 가운데 우뚝 솟은 영웅바위의 전설이 신기롭다. 이 바위는 옛날 어느 집 뒤들의 조그만 바위였던 것이 해일이 휩쓸자 주변이 바다로 향해 지금처럼 응대한 모습을 드러냈다고. 임신 왜란 때 왜군이 아산만으로 침공해 오자 이 바위는 갑자기 장군의 모습으로 바뀌고 주변의 작은 바위는 병졸로 되어 왜군이 대경실색, 퇴각했다는 것. 이조조경은 바위의 호를 영웅이라 칭하고 왕관자를 사했다고.
평택읍은 울긋불긋 원색의 다방·「바」등이 즐비하고 시골답지 않게 「핫·팬츠」 아가씨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이들 아가씨들은 기지촌 위안부들로 이곳에 미군부마가 많다는 것을 실명해주었다.
평택에서 송탄읍, 화성군 오산읍까지 40여리는 K-6, K-55 등 각종미군기지가 자리잡고 있는데 평택군 집계로는 2천3백80여명의 위안부들이 등록되어 있다. 최근 미군들 사이 흑백 분규를 빚어 시선을 모으기도 했던 기지촌 쑥 고개에는 한국인의 출입을 금하는 「나이트·클럽」 「바」에서 「재즈」음악이 요란히 울려나오고 있었다.
오산읍 죽백리는 6·25때 미군이 북괴군과 처음으로 격전을 벌인 곳. 당시 스미스 별동대가 미군 선발대로 왔다가 많은 희생을 냈다는 이곳엔 지금 유엔군 초전 참전비가 울창한 녹음 속에 솟아 있고 병점 못미처 왼쪽에 세마대가 보인다. 임신난 때 권율장군이 진을 쳤다가 가등청정군에 포위되어 물이 없어 큰 곤란을 겪게 되자 백마를 산꼭대기에 끌어올려 백미를 계속 끼얹어 물이 풍족함을 가장, 왜군의 포위를 풀게 했다해서 그 후 세마대라 칭했다.
드디어 서울의 남쪽관문 수원시에 들어서면 한가운데 자리잡은 팔달문의 위용. 가로 76척, 세로 28척으로 서울 남대문보다 규모가 큰 이 문에는 이조22대 정저의 수원천도 계획을 비롯, 갖가지 비화를 담고있다. 남친북소를 주장했다가 왕위를 노린다해서 뒤주 속에 갇혀 원사한 사도세자는 이조 궁중 비사로 너무나 유명하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백봉산에서 화산에 옮긴 후 지금의 주말농장이 있는 용주사를 건립했고 『모처럼 참봉을 하나 얻었더니 거둥이 스물 아홉번』이란 말까지 생겨날 만큼 화산릉 거둥이 잦았다고 한다.
정조는 재위18년만에 화산에 묻힌 아버지를 생각다 못해 수원천도를 결심, 2년 동안 수원축성에 심혈을 기울여 상곽을 완성, 남문인 팔달문을 비롯, 북문에 장안문, 동문에 창룡문 및 화서문을 만들었다고. 또 수원천을 건너기 위해 7개의 수문을 갖춘 화홍문, 바로 옆에 방화수류정, 파수대로 화서문 곁에 공심돈 등을 지었으며 『서호는 항주의 미이니라』는 소동파의 시에서 만 서호와 북호 등까지 팠으나 문무백관의 맹렬한 반대로 정조의 수원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
장안문과 창룡문 등은 6·25의 참화를 입어 밑 부분만 남았고 서호와 북호는 지금 강태공들이 몰려드는 낚시터.
수원의 명물은 딸기. 수원농대 옆 「푸른 지대」를 비롯, 곳곳에 딸기밭이 많아 서울시민들의 주말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팔달산 기슭에 「고향의 봄」악보와 가사가 새겨진 홍난파 선생 노래비가 있다. 1898년 수원 출생인 홍 선생은 일제의 울분을 노래로 엮은 「봉선화」를 흥얼대며 왼쪽으로 수원 연초제조창을 바라보며 노송지대를 2km쯤 달리면 조그만 고개가 지지대 고개. 정조가 부친 능을 참배하고 귀경할 때 몇 번이고 행차를 멈추고 돌아보았다 해서 느릴지(지)자 두개를 붙여 부르게 되었다고-. 이 고개를 내려가 오른쪽에 우뚝 솟은 관악산을 끼고 한달음에 안양·시흥을 거쳐 버스는 빌딩의 밀림 속 한강을 바라본다.
이제 중앙대 역전경주가 9일부터 펼쳐질 목포∼서울간 남북 1천2백 60리, 총504, 05km의 먼길을 풍류법 속에 종단했다. <주섭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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