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양녕대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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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산 안개물에 아침밥을 지어 먹고/칡넝쿨에 비친 달빛을 등불로 삼는다/외로운 바위 아래 홀로 누워 보니/오직 탑 한층이 있을 뿐이다.

조선조 권력 격변기의 왕세자 출신으론 보기 드믈게 예순아홉의 천수를 누린 양녕대군(1394~1462). 아버지 태종은 맏아들인 양녕이 스물다섯살 때 그의 지위를 박탈하고, 셋째아들 충녕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말년의 양녕이 이 시에서 노래하듯 시냇가에 나가 물을 떠서 직접 밥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위에 오른 세종이 "차례로 말하자면 내 자리에 있어야 할 형님이 시골에서 적적하게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고 걱정했을 정도니 양녕의 살림살이는 요족했을 게 틀림없다.

그렇다 해도 아버지의 서슬에 하루아침에 권력을 빼앗기고 동생의 신하들에게 평생 감시를 당하느라 한때 '미친 사람'행세를 해야 했던 양녕이었다. 진작부터 해와 달을 벗삼고 나무와 바위의 외로움을 배우고 흐르는 물의 무심함을 받아들이지 않았던들 양녕은 진짜 미쳤을지 모른다.

사실 양녕의 풍류 기질과 안빈낙도의 가치관은 권력의 칼에서 살아남기 위한 적극적인 자기 보호장치, 처세술의 성격이 짙다. 존재 자체가 권력적일 수밖에 없었던 그는 정치세계와 담을 쌓기 위해 눈물겹게 몸부림쳐야 했다.

양녕은 어릴 때 10년 이상을 외갓집에서 살았다. 자기를 극진하게 보살펴 줬던 외삼촌 민무회가 투옥됐을 때, 양녕은 그를 외면했다. 오히려 민무회가 과거에 자기를 찾아와 "세자도 우리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느냐"며 '패망한 우리 가문을 일으켜 달라'는 취지로 청탁했던 사건을 태종에게 폭로해 버렸다.

양녕은 왕의 처가이자 자신의 외가인 민씨 가문의 청탁이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적극적으로 먼저 해명했던 것이다. 의도적으로 권력과 멀어지려고 했던 이런 처세가 양녕을 편안한 삶으로 인도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집권자의 형제와 자녀, 처가 식구들이 자신들도 권력의 자리에 있는 줄 착각하다 패가망신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형인 건평씨가 '봉하대군'이란 비아냥을 받은 최근의 '청탁의혹 해프닝'도 비슷한 경우다. 盧대통령의 친인척들은 양녕대군에게서 교훈을 얻길 바란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