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싱가포르 현지 인터뷰] 클리프 리처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1969년 10월 서울의 한복판에서 사회에 충격을 주는 '사건'이 벌어졌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팝스타 클리프 리처드(Cliff Richard)의 내한공연으로 빚어진 일이다. 언론에선 애써 '해프닝'으로 돌리려 했지만 그 파장은 오늘날까지 회자될 정도로 컸다.

16일 시민회관 공연을 시작으로 17, 18일 이대공연을 통해 이 땅의 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게 사건의 핵심. 교과서에 실린 소설 '소나기'를 읽으면서도 얼굴을 붉힐 정도로 조신했던 그네들이 파란눈의 이방인에 미쳐 창피한 줄도 모르고 소리를 질러대고, 울음을 터뜨려댔으니….

이미 전날 클리프의 입국 때 공항에서부터 극성을 부린 이들은 첫 공연이 시작되자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비명을 질러대는 바람에 클리프가 "제발 조용히 해달라"고 사정할 정도였다.

특히 18일 이대 강당에서 열린 고별공연에는 수용인원(3천명)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몰려 유리창이 깨지면서 수십여명의 여학생들이 크게 다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울시내 여고들이 학생들의 공연접근을 막기 위해 클리프 방한에 맞춰 일제히 중간고사를 치르는 등 비상조치(?) 속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래는 클리프 리처드의 메시지와 서명.

그리고 지난 2월의 마지막 밤 싱가포르. 이날 이곳은 유난히 무더웠다. '인도어 스타디움'을 꽉 메운 1만여명의 '클리프매니어'들의 열광이 수은주를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새로운 앨범 '원티드(wanted)'의 홍보를 위한 아시아 투어 첫날인 이날 클리프는 오후 8시20분~11시까지 이어진 공연 내내 완벽히 살아있었다.

'위 돈 토크 에니모어(we don't talk anymore)'에 이어 데뷔곡 '무빗(move it)'을 시작으로 그가 무대를 종횡으로 오가며 특유의 현란한 몸비틀기 스텝속에 빨아들일 듯한 눈길을 실어보내자 대부분 50대인 팬들이 금세 소년.소녀로 무너져 내렸다.

특히 '쉰 소녀'들은 마법에 걸린 듯 그의 몸놀림에 따라 어깨를 으쓱이며 박수를 쳐대는가 하면 간간이 휘파람과 괴성을 질러대며 클리프의 카리스마에 도취됐다.

1부와 2부로 나뉜 이날 공연에서 클리프는 록 외에 발라드.댄스.캐롤 등 무려 29곡이나 부르며 스타디움을 데웠다. 중간 중간 다른 가수의 노래도 불렀다.

격렬한 티나 터너의 '왓스 러브 갓 투 두 위드 잇(what's love got to do with it)'은 소프트 터치로 새롭게 탄생됐고, 액션까지 흉내내며 2곡이나 부른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는 주인을 환생시키는 듯했다 (클리프는 사실 엘비스, 척 베리, 에벌리 브라더스를 들으며 음악을 시작했다. 그래서 공연 때마다 이들의 노래를 한두 곡씩은 반드시 레퍼터리에 넣곤 한다. 특히 엘비스는 존경의 대상이자 경쟁자였다).

자신의 출세곡이기도 한 영화 '더 영 원스(The young ones)''서머 홀리데이(Summer holiday)'의 주제곡을 부를 땐 "최고의 스타는 둘이 필요 없는 법"이라며 "내가 나오자 제임스 본드가 사라졌다"고 조크를 해 모두 자지러지게 하기도 했다.

이러는 사이 밤은 깊어가고 클리프는 땀 범벅이 됐다. 이윽고 경쾌한 리듬의 '컨그래출레이션(Congratulation)'이 박수파도 속에 합창으로 울려퍼지면서 공연이 끝나는 듯 했다. 순간 클리프가 목소리를 깔았다.

"9.11 테러, 발리참사 등으로 온 세계가 전쟁에 대한 불안으로 떨고 있습니다. 총칼을 들지 않아도 사랑과 용서가 없으면 이미 전쟁이나 마찬가집니다."

단아하게 가다듬어진 클리프의 '밀레니엄 프레어(Millenium Prayer)'가 울려퍼졌다. 새 천년을 맞으며 99년 주기도문에 '올드 랭 사인'의 멜로디를 붙여 만든 노래다. 청중이 모두 일어났다. 박수를 치며 따라 불렀다. 반복해 한번 더 불렀다. 그러고도 박수는 한동안 계속됐다.

클리프, 그는 결코 '왕년'의 스타가 아니었다. 환갑, 진갑을 넘긴 나이(63세)지만 여전히 싱싱하다. 클리프가 가수로 데뷔한 건 열여덟살이던 58년. 45년이나 됐다.

재작년 11월 나온 '원티드'까지 개인 앨범만 62집이나 되고 싱글은 1백39장(이중 백만장 이상 팔린 밀리언셀러만 15개다), EP 44장, 기획음반 8장이나 되지만 정작 그의 오리지널 곡이 몇이나 되는지 모른다(클리프는 "줄잡아 1천곡은 되지 않겠나"라며 음반사인 EMI의 집계로 2억5천만장 팔렸다고 귀띔했다).

청순한 이미지의 깨끗하고 잘 생긴 얼굴에다 모성애를 갈구하는 듯한 무대 매너로 정열적이면서도 소프트하게 뽑아내는 허스키-. 데뷔 초부터 전세계를 정복한 그의 인기는 지금까지도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된다. 4옥타브를 커버할 수 있는 천부적 재능에다 기독교적 성실이 나이가 들수록 음악의 폭과 깊이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76년 서방의 팝 스타로는 최초로 공산주의 소련을 방문해 공연을 갖는가 하면 90년 '실루엣'으로 엘비스의 영국차트 기록(55곡)을 깨는 등 정력적인 음악활동을 펴 95년10월 영국왕실로부터 작위를 받는 영광을 안았다(Sir 칭호를 받은 가수는 그와 믹 재거, 엘튼 존, 폴 매카트니 등 4명뿐이다). 99년 11월엔 '밀레니엄 프레어'를 영국, 뉴질랜드 차트 1위, 호주 차트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오는 7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34년만에 두 번째 내한공연을 갖는다.

"왜 그동안 불러주지 않았나. 15년전에도 얘기만 했으면 방한했을 것이다. 아직까지 나를 기다려주고 좋아해주는 팬들에게 감사한다."

클리프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건 그가 주연한 영화 '더 영원스'가 64년 국내상영되면서부터. 처음 '학생입장불가'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장가'로 바뀌면서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청소년들이 일거에 그의 포로가 돼 버렸다.

이듬해 초 여학생 7명으로 시작된 CFC(클리프 팬 클럽)까지 결성됐다. 데뷔 초부터 가는 곳마다 특히 소녀팬들의 열광으로 '클리프 히스테리'란 신조어까지 탄생시킨 그가 불과 6년만에 극동의 이 땅까지 점령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가 69년 한국을 다녀간 뒤 국내 가수공연에도 '오빠부대'가 극성을 부린 건 모두 그 덕분일 터.

-첫 방한공연 때의 기억이 나나.

"팬들이 노래를 굉장히 잘 불렀던 게 기억된다. 웨일스 사람들이 노래를 잘 부르는 걸로 유명한데 한국사람들은 아시아의 웨일스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도 그들이 노래부르는 걸 듣고 싶다."

그는 당시 팬들의 극성 때문에 경찰의 호위를 받은 걸 떠올리며 "대통령이 된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신을 만나면 특히 소녀들이 열광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사람들이 내 공연에 오는 건 정말 아름답고 즐거운 일이다. 공연에 와서 뭘 홀짝거리거나 목석처럼 뻣뻣이 있는 것보단 즐기는 게 낫다."

스스로 생각하는 매력포인트를 묻자 "누구나 자신을 잘 분석하지 않는 법"이라며 "딱 집어 말할 순 없지만 화를 잘 내지 않는 편"이리고 슬쩍 비껴갔다.

클리프 웹주소는 (www.cliffrichard.org)

이만훈 사회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