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기자 코너] '원칙 없는 사회'가 대구 참사 불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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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아버지의 친구 한 분(박석배.40.경북 경산시 남산면 하대리)은 실종된 조카(시영.20)의 시신을 아직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그 조카는 지난달 18일 아침 대구 중앙로역에서 불에 탄 전동차에 타고 있었다. 수업을 듣기 위해 외국어학원에 가던 길에 변을 당한 것이다.

친한 사람의 가족이 어느날 갑자기 억울하게 사고로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단순한 화재사고로 지하철 승객 수백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해 사고 나흘 뒤 현장으로 향했다.

중앙로역 입구에 도착하자 고인들의 넋을 추모하는 국화꽃송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이 났다.

시간이 꽤 지났건만 화마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고, 매캐한 냄새가 꼬를 찔렀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사방이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검게 그을린 벽에는 어둠 속에서 필사적으로 출구를 찾아 헤매던 사람들의 손자국이 선명했다.

출구를 가리켜야 할 비상등은 녹아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었다. 스티커사진기와 공중전화기 역시 플라스틱 부분이 녹아내려 형체만 남았다. 화재가 시작되었던 지하 3층은 더 참혹한 모습이었다.

벽에 붙어 있던 타일 대다수가 떨어져내려 어수선하게 바닥에 널려 있었다. 할아버지 한분이 그 곳에 비치됐던 그을린 소화기를 내던지며 오열했다.

나는 지하 3층에서 밖으로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재보았다. 과거에 두차례 정도 이 역에 와봤는데도 미로 같은 구조 때문에 빠른 걸음으로 4분 정도 걸렸다. 화재 즉시 밖으로 탈출했어도 길을 잘못 들면 불이 상가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 내린 방화셔터 때문에 피신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나처럼 현장을 보고 싶어 찾은 고등학생인 송윤옥(16.대구시 수성구 황금동)양은 "이제 와서 누구를 처벌하고 책임을 물은들 희생자들이 살아돌아올 수는 없다"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울먹였다.

화재경보가 울려도 무시한 담당자, 사고 당시 전동차의 문을 닫은 채 전원 열쇠를 빼내 혼자만 도망친 기관사, 불쏘시개 역할을 한 싸구려 지하철 내장재…. 모두 사고를 키운 요인이다.

경보가 울리면 담당자는 즉시 확인해야 옳다. 승객의 안전을 우선해 돌봐야 하는 게 기관사의 일이다. 내장재를 속여 쓴 행위는 생명을 담보로 돈을 버는 벌레만도 못한 사람들의 짓이다.

모두 제자리에서 원칙만 지켰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꿈만 같은 비극이 우리들의 눈에도 너무 안타깝다.

김자영(본지 학생 명예기자.대구 정화여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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