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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작업실] 1. '머털이' 이두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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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한 평 남짓한 만화가들의 책상은 시공을 초월하는 여행이 시작되는 승강장이다.

그 여행은 웃음보가 터질 수도, 눈물이 앞을 가릴 수도, 무서움에 몸서리가 처질 수도, 비장함에 숙연해질 수도 있다. 만화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여행을 준비하는 현장을 찾아간다. 안내원은 만화가가 분신처럼 아끼는 캐릭터들이다.

안녕하세요. 머털이예요. 동안(童顔)이지만 저도 벌써 스물세살 청년이랍니다. 1980년 '새벗'잡지에 '도사님 도사님 우리 도사님'을 통해 처음 세상에 나왔죠.

당시 아버님(이두호 세종대교수.60)은 일곱 군데에 연재를 하시느라 정신이 없으셨는데 이 잡지 편집장의 간곡한 제의를 받으셨대요. 그래서 하룻밤 만에 태어났어요.

문득 도술을 부려 하늘을 날고 싶었던 어릴 적 생각이 나셨대요. 이름도 쓱쓱 지으셨죠. 머리털을 뽑아 도술을 부리니까 '리'자를 뺀 '머털이'라고.

그런데 공들여 그린 다른 작품보다 제가 더 인기를 끌었다지 뭐예요. 그래서 평소 귀염받아온 제가 이 자리에 나오게 됐는지도 모르겠어요. 우직한 '독대'형님과 영리한 '까목이'형도 있는데.

하여튼 저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버님이 시대 만화만 고집하시는 건 잘 알고 계시죠? 그래서 아버님 작품을 '바지 저고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아버님은 우리 것이 좋으시대요. 작업실에도 몇 개 가져다 놓으셨어요.

자주 보아야 잊지 않는다면서. 저기 책장 위에 있는 게 패랭이예요. 옛날에 시골 장터에 가서 사신 건데 진짜 장돌뱅이들이 쓰던 거래요. 불 켜는 호롱도 보이시죠. 방패연이나 얼레는 다 아실 거고요.

저기 쌓여 있는 얇고 누런 책들은 '고담책'이라고 불리는 건데, 옛날 얘기 책이에요. '둑겁전'은 61년에 나왔다고 돼있네요. 띄어쓰기가 전혀 안돼 있어 요즘 분들은 읽기도 힘드실 걸요. 옛날에 청계천 근처에서 사무실을 내셨을 때 틈날 때마다 사 모으신 거래요.

책상머리에 죽 꽂혀 있는 앨범들은 가장 아끼시는 것들이에요. 절.탑.민속촌.경주 등 구분이 잘 돼 있죠. 각종 건축물이나 문창살 같은 것을 직접 찍어 만든 작은 앨범이 2백권이 넘어요. 옛날 건축물에 특히 관심이 많으세요.

아버님은 무척 예민하신 분이에요. 연필로 스케치하시고 펜으로 그리시는데 보통 하루에 펜촉을 두개 정도 쓰시죠. 펜끝의 날카로움과 탄력이 적당해야 선이 마음에 들게 나온다고 하세요.

저기 큰 커피병 다섯 개에 가득 들어 있는 펜촉이 '임꺽정'그릴 때 쓴 펜촉들이랍니다. 몽당연필도 병에 가득 있었는데 청소하다가 누가 다 버렸대요.

요즘 학생들 가르치시고, 또 틈틈이 새 작업 하시느라 바쁘세요. 얼마 전 이현세 선생님의 '천국의 신화'가 무죄판결을 받으셨잖아요. 그 비상대책위원장 감투를 6년 만에 벗으셔서 요즘 얼마나 홀가분해 하시는지 몰라요.

지금은 단편 '꼬꼬댁'을 동화책으로 만들기 위해 새로 일러스트 작업을 하고 계세요. 조선시대 인물열전을 그린 '가라사대'도 계속 애정을 보이시는 작품이고요. 한국의 역사를 만화로 그려내는 대작업도 추진하고 계세요.

올해 환갑이신데 어디서 그런 정열적인 힘이 나시는지 모르겠어요. 엊그제도 2박3일 동안 경주 탐사를 다녀오셨어요. "더 나이들기 전에 뭔가 해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더니 요즘 탐사도 자주 다니세요. 그 덕에 저도 또 새로운 모습으로 여러분을 뵐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또 뵈어요. 안녕.

글.사진=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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