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칼럼] 경제세력에 취약한 권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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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늘날 '재벌'로 불리는 경제세력은 자신들의 영역 밖인 정치 및 사회 각 분야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주체가 됐다. 한국의 '재벌'은 정부 주도 경제개발계획의 부산물로 생성됐다.

후진국으로 출발한 한국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 단기간 내에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자원 배분을 시장원리에 맡기지 않고 몇몇 특정 기업에 정책적으로 배분했다.

이와 함께 정부는 이들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각종 정책적 배려를 했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 아래 한국의 '재벌'들은 1960년대 생성기, 70년대 성장기, 80년대 팽창기를 거쳐 오늘의 경제.사회적 위치를 확보하고 일단의 경제세력으로 등장하게 됐다.

*** 민주화시대 경제력이 무기로

이러한 경제발전 과정에서 정경유착이 시작됐고 정치권력과 경제세력 간에 관계 변화를 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정치권력이 특정 집단을 위해 일방적으로 추진한 성장위주의 경제개발 정책은 일정 기업집단의 경제력뿐 아니라 이들의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동시에 증대시켜준 셈이다.

따라서 경제개발 초기단계에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던 경제세력은 경제력을 무기로 점차 정치권력에 비등한 위치를 점하더니 급기야는 정치권력이 견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이러한 현상은 80년대 중반 이후 정치의 민주화와 함께 확연하게 나타났다.

정치권력과 경제세력 사이의 보이지 않은 대표적인 힘의 변화는 재벌그룹들을 이끄는 사람들의 언행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한국 경제의 현재 위치도 마치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능력과 노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고, 정치권력은 오히려 자신들의 경제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어떤 재벌 총수는 공개적으로 "대한민국에 믿을 만한 지도자가 없다"라고 말해도 정치권력을 대표하는 대통령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이러한 정치권력과 경제세력 관계에서는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해야 할 경제 관료 집단이 국민경제의 중장기적인 효율을 향상시키고 경제안정을 이룩해 한국 경제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합리적인 경제정책을 수행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들 경제세력의 기득권에 지장을 주는 경제정책은 막강한 로비로 인해 의사결정 과정에서 관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김영삼 정권 말기인 97년 12월 3일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사태를 맞이하게 된 주요 요인 중 하나다.

IMF체제의 극복을 책임지고 출발한 김대중 정부는 초기에 한국 경제의 효율을 향상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재벌개혁에 대한 의욕을 보이면서 재벌을 개혁한 최초의 대통령이 될 것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5년을 살펴보면 한 재벌기업의 총수가 경영의 실패로 퇴장됐을 뿐 기업들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실질적인 재벌개혁은 이행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 기간에 재벌기업들이 경제정책의 의사결정 과정에 미치는 영향력은 더욱 증대됐다. 결국 '정치권력은 유한하고 경제세력은 영원하다'는 말처럼 5년 단임 정치권력은 경제세력의 힘 앞에서는 유약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 집권초기에 개혁 외쳤지만

지난달 25일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기간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활동과정에서 재벌개혁을 누누이 강조했다. 하지만 정권 내부의 일각에선 내년 4월 실시될 국회의원 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변화보다 현상유지 정책이 계속돼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인 것 같다. 역시 정치권력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제세력의 호감을 사자는 의도다.

그러나 재벌개혁이 집권 초기에 이뤄지지 못했을 때는 이것이 단순한 정치적 구호였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 경우 내년 총선거의 결과는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재벌개혁은 개혁 자체에 그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한국 경제의 중장기적인 효율 향상을 통한 국제 경쟁력 제고와 사회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새 정부는 과거 정권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김종인 <前 청와대 경제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