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랜 민간 신문의 하나인 황성 신문을 창간호부터 3대에 걸쳐 70여년간 간직해온 김광훈씨 (59·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269의 1)는 신문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흔하면 천대받는 다지만 묵은 신문이 저울에 달려 휴지로 팔리는 골목 안 풍경을 보면 서글픈 생각이 든다』는 김씨는 『신문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이 많을 때 신문은 곡 필을 쓸 수 없지 않겠는가』고 반문했다.
김씨가 3대째 보관해온 황성 신문은 창간호 (1898년·광무 2년9월5일자)부터 1900년12월까지 단 한 부도 빠뜨리지 않은 희귀본-. 김씨의 할아버지인 김홍두씨 (당시 관찰 부주사) 가 서울 수구문 밖 (현 광희문)에 살 때 이 신문을 구독, 소중히 모아뒀던 것이다.
나라가 일본 침략으로 어지럽자 김 옹은 고향인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교하리 「함박골」에 신문 뭉치를 들고 낙향, 촌로들을 사랑방에 모아놓고 신문을 읽어주며 나라 안팎 정세를 일러주는 것으로 소일했다.
가로 23cm 세로 31cm에 4호 활자로 찍힌 이 신문은 당시 독립 신문 등 개화기의 신문들이 한글 전용이고 혁신적인데 반해 국한문을 섞은 보수적 취향을 지녔다. 『그러나 남궁억씨가 사장 겸 주필이요 장지연씨 등이 참여한 이 신문은 한반도에서의 일노 각축을 소상히 파헤치고 당시의 부정부패를 매섭게 비판한 민의 상달의 공기였다』고 말했다.
김씨가 9살 때 조부 김 옹은 세상을 뜨면서 『이 신문은 개회기의 산 기록이니 영구 보관하여 후세의 신문 학도에게 물려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달리했다. 『할아버지·아버지 그리고 나는 이 신문철을 금쪽 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됐지요. 한번 읽은 뒤엔 꼭 다림질했고 봉밀을 씌운 두터운 창호지로 책갈피를 만들어 9권으로 된 신문을 사랑방 문갑 속에 소장하게 됐다』고 김씨는 말했다. 일제 말 우리 문화를 한창 말살하던 무렵엔 왜경에 뺏길까봐 천장 속에 보관하기도 했는데 황성 신문제호에 쌍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단다.
남의 손에 넘어갈까 두려워 국사 편찬 위원회에 나가는 장남 창기씨 (35)의 친구에게도 이 신문을 빌려주지 않아 구두쇠 노인이란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단 한번의 실수로 한 권을 잃었다는 것이다.
6·25때 실종된 박노웅이란 사람에게 빌려준 제9권을 아직도 돌려 받지 못했다. 『신문을 보관해 오는 반세기가 넘는 동안 6남매를 아무탈없이 길렀는데 그 책 한 권 잃은 것이 자식하나를 잃은 것처럼 허전하다』는 김씨는 이번 제15회 신문 주간을 맞아 제9권을 꼭 찾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잃은 곳은 서울 북아현동 217의 2 북성 국민학교 아랫동네였다는데 김씨는 남은 8권을 개인이 보관하자니 아무래도 미덥지가 못해 작년 10월 중앙일보사에 기증, 현재 본사 도서실에 보관돼 있다. <최규장 기자>최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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