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49)|학도의용군(6)|3사단 학도 중대(3)|6·25 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3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8월11일의 포항여중 전투에서 거의 옥쇄한 3사단 학도의용군 중대는 다시 1백20여명의 학생보충을 받아 재편되었다. 이때부터 중상으로 입원한 김용섭 중대장을 대신하여 사단에서 현역 장교가 직접 나와 중대장에 취임, 학도들의 훈련과 전투를 지휘했다. 재편된 학병중대는 포항에서 적의 마지막 9월 총공세를 맞아 싸우다가 유엔군의 총반격에 따라 사단과 함께 숙원의 북진을 감행, 함북 길주까지 올라갔다. 이북에서는 주로 선무와 정훈 공작을 하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부산으로 철수한 다음 다시 북상하여 충북 춘양에서 「학병중대」는 해체됐다.
불과 10개월도 못 되는 짧은 기간에 20세미만의 학도들로서는 엄청난 일들을 겪은 셈이다. 3사단 학병중대활동의 후반부 기록인 다음의 증언에는 처절한 전쟁 속에서 역시 학생다운 낭만과 휴머니즘이 넘쳐흐르고 있다.
▲남상선씨(당시 3사단 23연대소속 소위=학도의용군 중대장·예비역대령·현 사업·42) 『8월20일부터 중대장으로서 학도의용군중대를 지휘했습니다. 2차로 들어온 1백20명을 맡아서 낮에는 사격과 각개전투 등의 훈련을 시키고 밤에는 보전에 참가했죠. 이때 1소대장은 유명육군, 2소대장은 백영기군(현 육대 교수·중령), 선임하사는 박명식군이었지오. 전세가 불리하여 3사단은 구룡포로 후퇴해 있었는데 김석원 사단장이 지난11일 전투에서 희생된 학생들의 유해를 거두라고 명령해요

<원산학생과 축구시합도>
대원들을 이끌고 여중 앞에 가보니 한마디로 처참해요. 전사한지 보름이나 돼서 시체가 변해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가 있어야지오. 즉은 48명중에서 겨우 김춘식(감포) 이상현(부안·중앙대) 윤정한(양주·성남중) 김영환(대구·대구상) 이상헌(대구·대구공고) 김언구(평택·국민대) 이우근(양평·동성상) 윤★(보은·청주중) 윤재정(전주·신흥중) 김병선(태일·태일중)군의 10명 신원만 확인했어요. 신분증을 보니까 모두 타∼18세의 어린 학생들입디다.
여중 앞에 합동으로 묘를 만들어 「김김춘식 외 47인 지묘」라고 간단한 표지를 해놓고 후퇴했지요. 그후 63년에 이들 10명은 국립묘지로 이장했읍니다.
김석원 장군 후임으로 3사단장에 이종찬 장군이 오셨는데 이분도 전임자 못지 않게 학병 중대를 아끼고 잘 보살펴 주었어요 이 장군은 늘 휘하 장병에게 고된 훈련이나 규율에 있어 학병중대를 본받으라고 훈시했지요
북진 때는 사단 전투부대 뒤를 따르며 잔비도 소탕하고 정훈 활동을 했습니다. 묵호에서는 적 포로 7명을 잡았고, 여기서 3명의 여학생이 말리는데도 우리중대에 불어와 끝까지 종군했지요. 양양에서는 조치도군(현 진해서 약방경영)이 이끌고 온 23명의 진해학생들을 우리중대에 편입 시켰고요. 원산에 들어가서는 그들이 후퇴 때 우물 속에 학살한 양민들의 시체를 인양하기도 했어요. 한편 지금 생각해도 유쾌했던 것은 대원 중 대표 육상선수인 유명욱·엄팔용·김항규·홍용의 군이 중심이 돼서 육상훈련을 했읍니다. 새벽이면 모두 웃통을 벗고 구보로 원산시내를 누볐죠. 이북 학생들과 친선 축구시합도 했는데 역시 축구는 못 당하겠읍디다.

<춘양 서해산, 일부 현역에>
4천여 원산시민과 이북학생이 모여 우리 학도 의용군 환영대회를 열어줄 때에는 정말 신바람이 나더군요. 우리 학병 중대는 길주·무산·백암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 때문에 LST로 부산에 내려왔지요.
이때에 여러 에피소드가 있지만 다른 대원이 이야기할 것이고 부산서 부대를 정비하고는 전선에 나가 다시 춘양까지 올라가 여기서 대원30여명은 현역으로 입대하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갔죠.』
▲나덕자씨(당시 서울성신여중4년=3사단 학도의용군 대원·현 묵호서 다방업·37) 『미옥 언니와 안암동서 자취생활을 하다가 6·25를 만났는데 괴뢰들이 자꾸 여맹에 들라고 졸라서 죽어도 고향에 가 죽자고 대관령을 걸어서 묵호로 왔죠. 12일이 걸렸어요. 고향에와 보니 부모님은 이미 피란 가시고 우리 집은 괴뢰들이 쓰고 있어요. 할 수 없이 친구인 유양희 네 집에 가서 셋이 다락에 숨어살다가 9월25일에 국군을 만났어요.
이때 우리 자매와 유양희는 꼭 종군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3사단 학도 의용대를 찾아가 남상선 중대장에게 간청을 해서 겨우 종군 허락을 얻었지요.
남자대원들과 숙식을 같이했는데 처음엔 좀 서먹서먹했지만 좀 있으니까 모두 오빠나 아저씨 같아요. 부상병을 간호도 하고 밥과 빨래도 해주었지요. 길주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묵호로 내려오던 후퇴 때 일은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피란 민들이 아우성치는 함흥 거리에서 5세쯤 되어 보이는 머슴애가 혼자서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있어요. 하드 가엾어서 안아서 함께 배에 올라탔는데 이 꼬마는 묵호까지 오는 동안 계속 엄마를 부르며 울어댑디다. 견습 어머니 노릇을 하느라고 땀 뺐죠. 묵호서 우리부대가 재정비를 하고 이동할 때 이 꼬마를 더 데리고 다닐 수 없어 친척집에다 맡기고 떠났죠. 6개월만에 돌아와 보니 글쎄 그 꼬마가 급성폐렴으로 죽었다고 해요.
어찌나 가슴이 아픈지 눈물이 막 쏟아집디다. 지금도 거리에서 꼬마들을 보면 그 아이 생각이 나곤 해요』

<약혼표시…똑같은 초상화>
▲황재호씨(당시 태백 중4연=3사단 학병중대 화기소대장·현 정선 흑산 농장경영·41) 『원산에서 사단본부 옆에 우리학병중대 CP가 있는데 하루는 노인 한 분이 찾아왔어요. 6·25가 났을 때 저의 가친께서 먹으로 그린 노인의 초상화를 보이면서 통일이 되거든 이북에 있는 이 분을 찾아서 이야기를 듣고 결혼을 하라고 해요. 말하자면 어른들끼리 약혼을 해놓았던 거지요. 찾아온 노인도 저의 가친이 갖고 있던 것과 같은 초상화를 보이더군요.
그 노인은 학도병들의 시가 행진 때 내 명찰을 보고 찾아 봤다고 하면서 자기 집으로 가자는 거예요 진수 성찬으로 저녁을 먹고 나니 성숙한 처녀가 들어오데요 노인은 저 학생이 네 배필이니 이제부터 여필종부하라고 이르더군요. 이날 밤은 이 집에서 자고 이튿날 중대본부로 돌아왔죠. 와서보니 내 군복 한 벌이 없어졌어요. 물어보아도 모두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어요
마침 사단본부에서 회의가 있어 나와보니 지프 위에 내 군복을 입은 어젯밤 그 여자가 타고 있어요. 그리고는 「아버님께서 생사를 같이하라고 했으니 오늘부터는 어디라도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이때부터 조순복양은 한 대원이 돼서 나와함께 행동했고, 부산까지 같이 내려왔지요. 그런데 연락병의 오발로 그만 죽었어요. 내 손을 꼭 잡고 숨을 거두며 「나 같은 여자를 만나기가 힘들 거예요」하더군요. 그 여자의 말마따나 그 후는 많은 가정 풍파를 겪었습니다.』
▲장영호씨(당시 건국대2년=3사단 학도의용군 중대원·현 한전 동래영업소 근무·41) 『청진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자고 나니 후퇴명령이 내립디다. 화가 치밀어 여 의전서 널판지에 그린 김일성 초상회를 떼다 총으로 쏘며 분풀이를 했죠.
길주서 기차를 타고 후퇴하는데 터널을 지나다 이북인 기관사가 도망을 쳐 꼼짝할 수 없게 됐어요 마침 일이 되느라고 교통학교에 다니다 우리 대에 들어온 박인표군(현 서울철도 공작창 근무)이 운전을 하고 유명욱 소대장이 화부가 돼 기차를 운전해서 3사단·수도사단 병력과 민간인·군수물자를 모두 싣고 무사히 성진까지 내려왔지요.』

<"두만강 물에 손 담그면 복교">
▲조성제씨(당시 청구대1년=3사단 학도의용군 대원·현 농업진흥공사 경북지사 근무·42) 『이종자 사단장이 「너희들이 두만강 물에 손만 담그면 즉시 학교에 복교시켜준다」고 훈시해서 우리는 북진 때 사기가 중천 했어요. 그리고 우리들인기도 대단했고요·학병 마크만 달고 거리에 나가면 모두 부러운 눈초리로 보았으니까요. 이북 여학생들에 대한 인기는 최고였지요.
함흥간호대학생 5명이 한사코 함께 종군하겠다고 해서 모두 입대시켜 나중엔 부산까지 데리고 왔지요. 장전에서 여 선생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우리를 환영하는데 모두 맨발이에요. 참 가엾은 생각이 듭디다. 다 부질없는 이야기지만 그 때 중공군만 안나왔으면 통일이 됐는데….』
▲신기붕씨(당시 청구대1년=3사단 학도의용군 중대원·현 대구 아카데미 살롱경영·42) 『이북에서 우리가 받은 열렬한 환영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해요. 가는데 마다 민가에 들르면, 10년 지기나 만난 듯 반가와 했으니까요.
이 북 학생들은 우리 의용군 중대를 하늘처럼 우러러보구요. 그러나 우리들은 같은 학생이니까 별로 우월감을 갖지 않고 이들과 어울려 곧 친해졌어요. 후퇴할 때 자기 자식만이라도 남으로데려다 달라는 부모들이 많았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김용섭 초대 중대장의 증언을 듣고 3사단 학도의용군중대이야기는 끝을 맺겠다.

<가방에 아기 넣고 lst승선>
▲김용섭씨(당시 서울사대2연=초대3사단 학도 의용군 중대장·현 사업·41) 『나는 포항여중 전투에서 목에 관통상을 입고 야전병원과 경주 제3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9·28수복을 맞았죠. 빨리 학병중대에 들아 가고 싶어 못 배기겠더군요.
일단 서울에 와서 이종자사단장의 「메모」를 받아 가지고 부산에 내려가서 미군 LST를 타고 이북 성진에 상륙했지요. 다시 길주에 가서 처음으로 학도 중대원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데 3일만에 후퇴명령이 내려오. 성진으로 내려와서 그곳 국민학교 서무주임 집에 숙소를 경했는데 결혼 때 장만한 새 침구를 내놓으면서 환대해줍디다. 그리고는 아침에 자기들도 남으로데려다 달라고 해요.
그래 부부는 군복으로 갈아 입혀 대원으로 가장하고 갓난아기는 유명욱 군이 큰 가방 속에 넣어 미군 헌병들의 검문을 무사히 통과, LST에 올라탔지요. 12월17일에 부산에서 헤어졌는데 이분들은 지금도 부산서 약방을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학병중대는 재정비해 가지고 계속 전선에서 싸우면서4월 중순에 충북 춘양까지 올라갔는데 여기서 학병중대 해체문제가 났어요. 3사단 작전참모 정내혁중령이 상부명령이라고 하면서 현역입대를 권하더군오. 대부분은 학생신분으로 끝까지 종군하고 싶었지만 이렇게되니 만10개월만에 자연해체가 됐지요. 일부는 현역입대를 했구요.』
※정정=본 연재 148회 본문 기사 중 취사병 황만재군을 연락병으로 바로 잡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