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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낙원은 바로 지상에…인간은 역시 선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여행기를 정작 끝맺으려고 하니 새삼스럽게 독자 여러분께 죄를 지은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세계를 쏘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오만가지 이야기들을 제대로 전달해 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때로는 생명의 위험을 받으면서까지 현대 속의 원시라 할 미개지역에 뛰어들어가 새로운 참 모습을 찾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이렇다할 수확을 거두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하는 허전함마저 생긴다.
1·2·3차 여행을 합하여 1백여 나라를 두루 돌아다녔으니 이른바 「세계의 진리」를 깨우쳤을 법도 한데 도리어 세계에 대한 더 큰 회의만을 품게 되었으니 웬일일까.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는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세계가 크기 때문인지, 세계상을 나의 오관으로 붙든 것 같았으나 막상 붙들고 보면 그것이 실상이 아닌 허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번 남태평양 제도와 서구·북구를 여행하면서 나의 전공인 역사·지리의 답사와 함께 쓰러져가는 문명과 아직 새벽도 맞지 않은 미개사회를 비교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큰 과제로서는 현재 세계를 비참의 도가니 속에 몰아 넣고 있는 사상·종교들의 분쟁의 요소가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일도 그 하나였다.
그런데 여러 나라는 한결같이 서로 자기의 것만을 절대시하고 있는데 이 편협된 사고방식은 그들의 여건으로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이 타협하려고도, 또 타협하지도 못하는 이것이 현재의 세계 비극의 큰 원인이 아닐까. 이 같은 고집이 필연적이라고 볼 때 세계의 비극을 만드는 것은 실은 이편도 저편도 아닌 어떤 유령적인 그 무엇이라고 한다면 나의 역설일까.
여러 나라 국경을 넘으면서 느낀 것은 공자나 석가나 예수나 「소크라테스」같은 성인이 현대에 나타나서 세계를 두루 다녔다면 종교 사상들의 대립으로 말미암은 현대와 같은 비극을 구원할 보다 훌륭한 종교나 사상을 이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감정적인 편파성 따위가 지배하는 세계는 비참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코 이런 비관만을 하고 싶지는 않다. 세계는 지금 악덕할 대로 악덕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하나의 현상일 뿐 결코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사무치게 느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도깨비 같은 그 무엇, 어쩌다 나타난 악마형인 천재들의 세계를 괴롭히고 있을 뿐 전 인류의 대다수는 그와 반대로 너무나도 선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남태평양제도의 미개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에게서도 새로운 인간선을 찾을 수 있었다. 굳이 맹자의 성선설이니 「칸트」의 본능적인 도덕률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원죄이전의 선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희한한 일이다.
남태평양 제도의 자연은 더욱 아름답다. 「에덴」인들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하고 생각될 만큼 섬들은 황홀하게 해준다. 더구나 「스콜」이 많은 열대에는 정녕 원색 이상의 광채 감도는 무지개가 수시로 푸른 하늘을 장식해주는가 하면 가지가지 화초가 우거진 삼림이며 밀림에선 저 법열의 새 극락조를 비롯한 수많은 새들이 천상의 노래와도 같은 기막힌 노래를 부른다. 천국이 따로 있지 않고 이 지상이 바로 천국이 아닌가.
그러나 호투적인 사람들은 이렇듯 축복 받은 「에덴」마저 더럽히고 있었다. 이런 낙원에 전쟁의 형해라 할 망가진 비행기며, 「탱크」를 비롯한 전몰 병사들의 해골들이 뒹굴고 있는 것을 볼 때 『에덴에서의 원죄』보다 더 모진 『에덴에서의 전쟁』을 일삼는 것이 무지한 인간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다.
세계 어느 곳이든 격전지 아닌 곳이 없다시피 하지만 「에덴」에서까지 싸워야하는 인간들에 대한 불신이 치솟아 인간에 대한 또 하나의 구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인간자체에 탐닉되어도 안되지만 또한 자연에만 탐닉되어도 안될지 모르나 창조의 주체는 인간보다는 자연의 편에 들어있는 듯 했다.
지금 세계는 우주 시대니 하여 제법 초인 아닌 우주인으로 승격된 듯한 지적 오만을 지니지만 인간보다는 자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세계는 깡그리 노출된 듯이 보이지만 형상의 저 피안에는 신비스러운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딴 천체를 보는 망원경을 차라리 이 땅위의 먼 곳에 돌려야 하지 않을까 한다. <끝> [여행기를 끝내면서 김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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