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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제7화>양식반세기전(2)|이중일<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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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성역 구내식당>
경성역 구내식당의 「웨이터」가 됐지만 나는 아직 「풀·코스」정식을 거둘 순 없었다. 일본인 「웨이터」 들의 잔시중을 들다 한동안은 술로 찌꺼기 고기 담긴 접시만 닦는 것이 내 임무였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나는 「알라카드」(한 「코스」로 끝나는 일품요리)를 맡게됐다. 처음으로 손님 앞에 나서게된 것이다.
『하이, 하이』(네, 네)-. 식탁에서 칼질을 하는 손님이 어깨만 움쩍거려도 「하이」(네)하고 대령 할 수 있도록 손님으로부터 석자 세치쯤 떨어져 꼿꼿이 서 있어야 했다. 손님에겐 항상 45도 각도의 깍듯한 경례를 붙였다. 일품요리를 1년쯤 실수 없이 「서브」했더니 정식을 보라했다.
일본 「웨이터」들은 한국손님에겐 시중들기 싫다는 듯 한국손님이 오면 노골적으로 『가서 봐주라』는 시늉을 하여 그나마 정식 「코스」를 맡게 된 것이다. 당시 「메뉴」는 낮엔 「수프」와 생선과 빵 그리고 쇠고기와 닭,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과일 「파이」, 「푸딩」이 나왔다. 밤엔 「칵테일」과 「오트볼」빵 「수프」 생선 혹은 감자(15몸메=구=일어) 쇠고기(20몸메) 그리고 닭고기(1마리가 4인분으로 쓰였다)가 「샐러드」와 함께 나왔고 후식으론 과일과 「코피」또는 홍차가 따랐다. 양식이라지만 온통 「프랑스」 「스타일」이어서 순서에 따라 점식을 들자면 꼬박 1시간 반이 걸렸고 밤에 정식을 들자면 2시간은 잡아야했다.
양식 값은 당시 쌀 한 말에 70전인데 A정식이 3원20전이었으니 양식한끼에 쌀 닷말 값이 날아가는 셈이었다.
가장 대중적이었던 경성역 구내 식당에선 2원50전 정도였고 「런치」는 1원20전이었으니 언제나 만원일수 밖에 없었다.
지금의 서울역인 경성역을 설계한 것이 1925년께 였는데 당시 서울인구는 약10만명 1지금의 50분의1이었다. 그러므로 역사 신축 땐 서울인구가 50만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해서 경성역을 지었던 것이다.
부산을 거쳐 함경도 지방으로 가는 여객, 만주로 가는 실업가, 장사치, 만주에서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들어가는 상인과 회사간부들, 더구나 경원선의 개통 전이라서 경성역은 많은 손님으로 들끓었다.
당시 음식값을 보면 설렁탕이 15전, 「카레라이스」가 30전, 왜식정식이 1원이었으니 2∼3원이 넘는 양식을 드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시피 했다. 한국사람들은 극도의 경제핍박으로 설렁탕 사먹기도 힘들었거니와 학생들은 5전 짜리 호떡1개로 끼니를 떼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달 봉급이 보통40∼50원씩이었으니 월급장이들은 일과가 파하면 5전 짜리 술 한잔에 5전 짜리 안주1개를 집어먹고 집으로 향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경성역 「레스토랑」도 한국인이란 찾아보기 어려웠고 주로 일본사람들이 찾아들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땅을 갉아먹는 일본의 총독부관리·실업가·상인·관상가. 군인들이 「레스토랑」을 독차지했던 「아이러니」속에서도 우리나라 개화기의 멋장이들은 잊지 않고 양찬을 찾아 「레스토랑」을 드나들었다. 나라 잃은 설움을 안은 채 일인 밑에서 「웨이터」로 일하던 나는 거드름을 피우는 일본고객들의 숲을 누비며 「레스토랑」에 당당한 신사의 풍모를 드러내곤 하던 멋장이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1920∼30년대에 양식집을 자주 출입하던 인사들은 ????????????????? 윤덕영씨를 비롯, 윤치호 윤치왕씨 그리고 독립지사로 서재필, 김규식 여운형씨, 실업가로 김연수 배석환씨, 「세브란스」계통으로 오긍선 윤일선 이형준 이용설씨, 체육인으로 「홈런」왕 이형민씨, 언론인으론 김을한 이길용씨, 교육가론 백상규 최규동씨 등, 손으로 언제라도 꼽을 수 있는 명사들이었다.
경성역 구내 「레스토랑」을 뻔질나게 드나들기론 「세브란스」병원의 의사 「그룹」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미국유학에서 갓 돌아온 신 지식인들로 양식을 제대로 먹을 줄 알뿐 아니라 서구 물이 든 지식인들의 사교장교로 양식집을 택해 유학시절을 그리는 성 싶었다. 그런가하면 윤비의 삼촌 윤덕형씨 같은 이는 『자택 천장에서 금붕어가 논다』고 소문났을 이 만큼 부자였으므로 비싼 양찬을 찾아 식도락을 즐겼다. 중동 중학을 설립한 최규동씨는 언제나 부인을 동반, 「잉꼬」부부의 멋을 부렸고 영어 잘하는 백상규씨, 「프랑스」말 잘하는김규식 박사·김용진씨(전 주불대사)는 일본말이 판치는 2백여 「테이블」의 「레스토랑」한복판에서 「프랑스」 말로 호탕한 담소를 구사, 일본인들의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가난에 쪼들렸던 여운형 선생이 구내식당의 주빈석에 떡 버티고 앉아 노상 칼질을 했다. 이상하다싶어 알아본 즉 몽양선생(여씨의 호)은 무일푼이었으나 장안의 거부 배석환씨가 1년내내 주빈석을 예약해 놓다시피 대소연회를 베풀었기 때문에 배씨의 양해아래 몽양 선생은 한쪽자리를 거저 차지하고 큰기침을 하면서 칼질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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