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작품 쓴다고 대중 영합 아니다|박남수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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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 달에 발표된 작품 가운데 내가 흥미를 느낀 작품은 송욱의 『아악』이다. 오래간만에 대하는 작품이란 점에서도 그렇지만 그 보다도 이 작품을 읽고 난해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슬프다 하면/너무 무겁고/무겁다 하면/너무 깊으다. /하늘인가 바단가/흘러가는 가락인가/살벌 떼가 날으는/밤을 다한 마음인가/넓어질수록/아아 흥청대는 공문이여!/가라앉아도/아아 싱싱한 시간이여!/불꽃을 통기면서/휩싸고 돈다.
이것이 『아악』(신동아) 의 전부이지만, 여기에는 난해한 낱말도 난해한 구문도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고 나에게 남은 것은 가락뿐, 그 작품의 적기가 된 부제의 「중광지곡」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결국 아무 것도 이해한 것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말하자면 작품으로 들어갈 통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엘리어트」가 말하는 기본 정서가 다뤄지든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오관으로 받아질 수 있는 방법, 가령 이미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면 이해의 길을 막게 되지 않나 싶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신석초의 『바라춤』이나, 조지훈의 『승무』같은 작품도 춤에서 얻은 감흥을 소재로 했지만, 춤에 대한 아무런 소양이 없더라도, 그 춤과는 관계없이 작품이 독립하여 우리에게 공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과 『아악』은 대조적이었다. 물론 춤과 음악의 차이에서 오는 점도 있겠지만, 가락을 시각화하는 노력을 했더라면 작품은 이해에 상당한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아악』과는 달리 황금찬의 『인정』(월간 중앙) 같은 작품은 작품의 우열의 문제를 떠나서 우선 쉽게 읽히는 작품이었다. 15년쯤 애용한 한 자루의 만년필, 오래 써온 한 벌의 수저에서 느끼는 반려의 정이 다뤄진 작품이다. 이런 정서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작자의 생각이 지체 없이 독자의 정서로 전이할 수 있는데서 오는 것일 것이다.
어쨌든 작품의 전달력은 공통으로 느낄 수 있는 정서든가, 독자의 가슴에 자고 있는 정서에 시라는 성냥개비가 불을 달여주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혼자의 느낌이나 지나친 개성은 역시 전달력을 가지기 어려울 것 같다.
시가 꼭히 쉬워야 한다는 이유는 없지만, 표현하는 일은 한편에 전달이란 부채를 지는 행위인 만큼 점차적으로 독자와의 통로를 열어가야 하겠고 또 그러기 위하여는 역시 독자보다도 시인의, 편에서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수밖에는 없을 듯하다
쉬운 작품을 쓴다고 해서 옛 가락으로 돌아간다든가 대중에 영합하자는 것은 아니다. 후퇴 없는 평역성을 모색하는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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