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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설화 「처용가」의 주인공 "처용은「이슬람」상인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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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라 고가의「처용가」는 그 감정표현이 너무나 솔직 대담하여 국문학에서 이색적인 작품이라 하겠으나, 이 향가의 작가인 처용의 출현과 그 읊어진 경위를 설명한『삼국유사』의 기록은 너무나 신비적이고 엽기적이기도 하다.
신라 제49대 헌강왕이 개운포를 순유하고 환가 할 때 갑자기 운무의 천변을 겪었는데 천변을 일으킨 동해용을 위해 근처에 불사를 창건케 했더니 동해용이 기뻐하여 7자를 데리고 나와 찬덕·가무하기에 1자를 주경에 데려와 왕정을 보좌케 하니 이가 처용이었다. 처객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결혼시킨 미녀가 그 미모를 흠모한 역신과 동침하는 것을 보고 처용이 읊은 것이「처용가」라고 기록돼있다.
설화에서 역사적 현실의 반영을 파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나는「진단학보」32호를 통해『처용설화의 일고찰-당대 이슬람 상인과 신라』라는 글로 소신을 개진했다.
처용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신라인의 심리에 반영된 용이 어떤 것이었으며 그 능력이 어떤 것이었는가 문제였다.
용이 물과 불가리의 관계에 있으며 인문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항해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기 마련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에서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용이 정치적 통치력의 상징으로서만 보아질 수 없으며 항해·선박과 밀접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수로부인 설화의 동해용은 경주에서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순정공의 행차에서 그 부인을 약취하였다가 태수 측이 베문 주술에 바다로부터 부인을 돌려보낸 다고 하는데 이것은 바다에서 나타난 괴선을 해용으로 본 것이며 당시 동해안에 출몰하여 인구와 재산 약거를 일삼던 왜해 적선이 거의 틀림없다. 똑 같이 서해용도 당말의 정치 혼란기에 한반도 부근에까지 침범하던 중국해적으로 볼 수 있다.
『삼국유사』보다 1백40년이나 앞선 『삼국사기』나 『익제난고』『경상도 지리지』등에 보면 「형용가해」하고「의건 궤리」한 일행이 처용과 그 동반자라는 것을 지칭한 것이 확실하다. 울산 개운포에 나타난 이들은「산해정령」으로 보일 정도로 괴이한 자연인이었던 것이다.
울산은 당시 신라의 정치 중심지인 경주를 배후에 두고 산업심장부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천연적 항구로서의 호조건과 내륙교통의 요지였고 국제항의 성격마저 띠었었다.
울산 만으로부터 신라인들은 곧 바로 중국의 양주에 이르는 뱃길을 개척했다.
9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양주는 가장 번성한 「아라비」아 「페르샤계」상호가 붐비던 무역 중심지였다. 때문에 중국의 광주·남창·항주·양주·명주 등과 연결된 신라의 서남해안 항로를 통해 대식상인의 교역 물이 신라인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이슬람」상인의 기록「이븐·쿠르다드바」와 「마우스디」에는 신라가 금이 많이 나고 살기 좋은 땅으로 소개된 것으로 봐서 이들이 신라에의 상로 개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처용 일행의 용모와 착의가 심상치 않았음은 이미 지적되었지만 「익재난고」나 「악학궤범」에 처용을 『붉은 얼굴과 흰 이』를 가졌고 「가정집」과 「목수집」이『많은 꽃을 머리에 꽂아 기운머리』를 가진 것으로 표현하여 그리스나「페르샤」풍의 화관을 연상시킨다. 처용의 가면 도나「처용가」의 표현으로 봐도 처용이 심목고비의 종족임을 암시했다.
또 사사불마의 묘법으로 믿어지던 서 아시아의 가면무가 당대의 호무호희로 다시 우리의 「산예」,즉 사자가면무로 나타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처용이 처의 간통을 목격하고 읊었던『동경 발기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의 노래도 상업경기를 타고 환악 도시로 성장했던 9세기의 메카나 메지나의 연애 시나 풍자시 또는 인도의 성욕문학을 받아들인 이슬람 문학의 수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처용에게「급간」의 관계를 주고 주정을 보좌케 했다는 것도 그의 어떤 재능을 인정하고서의 결단으로 생각된다. 경제체제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던 당시의 신라에 있어서 이슬람 상인의 이재술은 기대를 받게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경제 추세는 이러한 이재가로도 구할 수 없었다. 시의 가운데 고민하다 사라진 처용이었으나 군사불마에 효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남다른 용모와 정통적인 서아의 가무로 후세에까지 길이 전통적인 존재가치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슬람 상인 처용의 울산 표착은 한반도의 경제구제의 변환기에 이루어진 것이며 그에 관한 설화는 한국경제사에 중요사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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