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개혁이 사람 잡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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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중국 역사를 관통하며 줄기차게 제기되는 이상향이 정전제(井田制)사회다. 밭 전(田)자 형태로 땅을 똑같이 나누고 똑같이 일하며 똑같이 세금을 내는 만민평등의 대동사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중국의 어떤 왕조도 이런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왕조가 무너지고 새 왕조가 들어설 때면 이런 이상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것이 정치개혁의 구호였고 그 구호가 덧없음을 현실적으로 수없이 확인했으면서도 개혁의 목소리는 또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의 최근판이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혁(文革)이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개혁의 희생양이 되었던가.

*** 현실 무시한 공허한 이상주의

인간은 꿈을 먹고 산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이상을 세우고 꿈을 꾼다. 그것이 사회를, 인간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꿈은 나라를 망치고 개인을 죽이며 국민을 도탄(塗炭)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동구에서, 소련에서 그리고 북한에서 현실로 우리는 보아 왔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이상주의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례를 미국 역대 대통령의 정책 속에서 찾고 있다(IHT 2월 19일자).

우드로 윌슨형 미국 자유주의자들이 미 중앙정보국(CIA)을 무력화하고 첩보수집을 약화시킴으로써 보스니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주의 세력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방글라데시와 캄보디아의 저임금 노동착취를 없애려고 노력하니 결과적으로는 이들 공장의 10대 소녀들을 섹스산업으로 내몰게 됐다.

부시는 중국 정부가 농민들의 유산을 강요하는 데 분노하고 미국의 유엔 인구기금 지원비 3천4백만달러를 삭감해 버렸다. 그 결과는 아프리카에서의 조사원 교육, 에이즈 퇴치운동, 임신예방 활동들을 모두 취소하는 엉뚱한 사태로 발전했다. 부시의 이상주의가 결과적으로는 아프리카 여성들과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게 된 것이다.

부시의 '악의 축'규정도 미국식 보수주의의 공허한 이상주의 구호여서 북한을 대화로 이끌기보다는 핵개발로 유도하고, 이라크 공격도 끝내는 테러리스트들에게 탄저병과 천연두균을 제공하는 빌미를 주면서 수천의 아랍 청년을 알 카에다로 합류시키는 가공할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좌파든 우파든 현실을 무시한 공허한 이상주의는 여러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례를 크리스토프는 적시하면서 중요한 것은 이상보다는 현실, 현실적 결과를 두려워하는 정책을 세우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지금 우리는 5년 단위의 민간정부를 세번째 맞고 있다. 그리고 똑같은 목소리의 개혁이라는 구호를 10년 넘는 지금 또 듣고 앞으로도 상당기간 개혁의 포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10년의 민간정부가 시도했던 개혁정책의 실패를 보면서 똑같은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개혁의 개념을 다시 정립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먼저 개혁이 이념의 포로가 돼선 안된다. 이데올로기나 이상의 노예가 돼선 어떤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 훌륭한 인재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양성할 것인가에 교육목표를 세워야지, 모든 교육은 평등해야 한다는 이념으로 접근하면 서울대 신입생들에게 수학을 다시 가르쳐야 하는 참담한 현실을 맞는다.

의약분업을 현실로 접근하지 못하고 이념으로 몰아가니 의료대란이 일어난 것이다. 민족자존 좋다. 그러나 그것이 북한을 오판케 해 대량살육의 전쟁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문제를 주의(主義)로 풀려 하니 실패가 된다. 이념의 포로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라.

*** 민주적 질서 회복이 본체여야

개혁은 이제 진부한 구호다. 세상은 저절로 변하고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면 낙오할 수밖에 없다. 기업이 변하고 개인 스스로도 변화의 몸부림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개혁 자체가 삶의 일부다.

개혁을 구호로 내걸 게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을 정부가 어떻게 수용하고 대처할 것인가에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개인과 사회와 기업이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게 정부고 정치다. 남을 개혁하려고 덤빌 게 아니라 정부와 정치 스스로가 변하려는 개혁의 실천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개혁은 민주적 질서의 정상화다. 군사독재, 개발독재 그리고 이에 대항했던 민주화 투쟁세력의 집권 10년 속에서 왜곡.굴절됐던 잘못을 바로잡고 정상화하는 노력이 개혁의 본체여야 한다. 글로벌 기준에 맞는 민주적 질서 회복과 정상화가 개혁의 기본이다. 더 이상은 군말이거나 거짓일 뿐이다.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