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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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난데없이 수류탄이 터졌다. 9천「피트」상공을 날던 F27기는 기우뚱했다. 비행기 밑바닥엔 구멍이 뚫리고 세찬 바람이 밀려들었다. 아우성과 울부짖음.
두번째 수류탄이 폭발했다. 조종실 문이 부서졌다. 「스튜어디스」는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기수를 북으로 돌려라. 내가 지금 하고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알겠지』.
범인은 고함을 질렀다. 기장은 순간 비행기의 고도를 낮추었다. 1천「피트」. 우선 기체의 폭발을 막아야 했다. 승객 중에는 공안원에게 『저 범인을 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공안원은 아직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이 경황 속에서도 「스튜어디스」는 상처의 피를 닦으며, 『여기는 남한이니 안심하라』고 승객들을 진정시켰다.
비행기는 급선회, 기수를 돌렸다. 방향을 정반대로 한 것이다. 기장은 범인의 긴장을 이렇게 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객석 저쪽에서는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목을 놓고 우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쪽을 보고 자꾸 울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무슨 일일까? 나중에 폭소한 일이지만 공안원의 기지였다. 마치 비행기는 북괴의 상공을 날고 있는 듯이 위장을 하려는 것이었다.
「스튜어디스」는 정말 여기는 청진이라고 말했다. 범인은 어리둥절하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공안원은 비로소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범인의 손엔 안전「핀」을 뺀 수류탄이 들려 있었다. 수습조종사는 쓰러진 거인의 몸 위를 덮쳤다. 그 폭발을 몸으로 막으려는 행동이었다.
KAL기 납북 극은 이렇게 끝이 났다. 비행기는 초도리 백사장에 동체착륙을 했다.
40여분간의 숨막히는 혈투는 순간순간 감동적인 기지와 침착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4명의 승무원과 1명의 공안원은 실로 생각지도 못할 인간「드라머」를 상공에서 연출했다. 어느 한사람이 당혹과 불성실한 작용을 했어도 이 혈투는 무참한 비극으로 끝을 맺었을 것이다.
직무유기와 태만과 인간불성실이 빚는 비극을 이 세태 속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역겹게 보아왔다. 그러나 간성 상공에서 벌어진 그 절박하고 긴장된 「드라머」속에서 우리는 책임인간들의 성실성을 발견했다. 새삼 감동이 큰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만으로 훌륭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죽음이 만약 자기가 가지고 있는 책임관념에 깊이 뿌리를 박고있지 않다면 말이다』「야간비행」의 불 작가 「셍텍쥐페리」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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