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제자는 필자|제4화 명월관(18)-3·1운동 후 눈뜬 애국지사들의 연락역 맡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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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3·1운동이 일어난 후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는 눈도 달라졌지만 기생들이 세상을 보는 눈도 하루하루 변해갔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일본유학생들이 사각모자를 쓰고 돌아왔고, 상해를 것점으로한 애국지사들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돈을 물쓰 듯 한다든가 전직이 높았다는 것만으로 기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목이 터져라 외치던 기미대한독립만세에서 애국이 무엇인지 알게된 기생들의 귀에 아직도 만세의 여운이 감겨있어 애국지사나 우국 청년을 따르는 이른바 사상기생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기미독립선언을 한 태화관은 일인들의 압력으로 문을 닫고 주인 안순환씨는 지금 조흥은행 본점자리에 식도원이란 요릿집을 새로 냈다. 그러므로 명월관 이름은 그전 장춘관 자리에서 명맥을 보전하면서 새 시대의 손님을 맞게 되었다.
기미독립선언 이후 일인들은 한국사람이 3인만 모여 있어도 감시하기 일쑤였다. 비교적 요릿집은 자유로운 상태이어서 애국지사들은 요릿집에 잠입하게되고 명월관은 우국지사들의 숨막히는 연락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어느 날 명월관에 나가던 남도기생 현산옥 집에는 상해에서 잠입한 애국지사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명월관 인력거꾼이 한밤중에 산옥의 집에 쪽지를 전했다. 뒤따라온 일인형사의 무슨 쪽지냐는 질문에 인력거꾼과 산옥의 대답은 『문밖놀이에 나오라는 기별쪽지』라고 똑같은 대답을 했으나 믿지 않았다.
일인형사는 산옥의 어머니 방문을 열었지만 가발을 하고 산옥 어머니와 같은 이불 속에 누운 애국지사를 발견하지 못했다한다. 이 무렵 인력거꾼 중에는 고학생들이 많았고 이들은 애국지사의 연락역을 맡은 사람이 많았다. 인력거를 타고 가던 기생이 인력거꾼이 고학생인줄을 눈치채고 그 자리에서 내려 돈을 주고 걸어갔다는 이야기는 달라진 기생들의 마음을 엿보이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한번은 식도원에서 인촌 김성수 선생과 친일파 박춘금과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화가 난 박춘금이 육혈포를 꺼내 인촌 선생을 겨누는 바람에 방안은 초긴장상태였다 한다.
이때 기생들은 재빠르게 인촌선생 주위에 둘러서 『쏘려면 우리를 쏘라』고 막아서는 바람에 박춘금은 총을 거두었다.
이날 인촌선생께서는 많은 기생 중에서 대표 격인 이 연행을 자택으로 불러 부인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하셨다고 하니 인촌 선생의 덕과 인자하신 모습을 보는 듯 선하다.
이와 같은 사상기생들의 활동은 곳곳에서 절개와 지조를 생명으로 알던 초기 명기들의 후배답게 찬란한 빛을 뿜고있었다. 그러나 일부는 검은색 강동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뾰족구두에 양산을 든 신여성흉내를 내는가하면 일부는 돈과 협박에 끌려 밀정기생이 된 사람도 없지 않았다.
이 무렵 서울에는 요릿집이 많았지만 명월관·국일관·식도원 등이 큰 것으로 손꼽혔다. 명월관은 점잖은 손님, 국일관은 장사하는 신흥부호, 식도원은 일본사람과 관공리들로 각각 손님이 대강 구별되었다. 그러나 1929년 이른바 일본이 한국을 점령통치한 20주년시정기념을 위한 조선박람회가 경복궁에서 열리게 되자 이와 같은 구분은 사라지고 한마디로 명월관을 휘저어놓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일인들은 1915년에도 시정5주년기념공진회를 서울에서 연바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미독립선언이 튀어나오자 깜짝 놀라 소위 문학정책이란 것을 펴고 제법 치적을 자랑하고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박람회를 벌였던 것이다.
시골에서 돈 깨나 있다는 사람들은 모두 박람회 구경에 나섰고, 서울에 온김에 말로만 듣던 명월관을 찾아 기생들과 함께 술을 마셔보리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명월관을 찾아드니 점잖은 손님은 끊어지고 시골부자들 판이 되고 말았다. 이 바람에 명월관 기생 중에는 공부해서 가정을 꾸미거나 신여성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된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도출신 정금죽, 서도출신 김금도 등이 제일 처음으로 일본유학을 떠났다.
또한 사각모자를 쓴 유학생과 연애에 빠져 이루지 못할 사랑에 청춘을 불태우다 정사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몇년 전에 인기 「라디오·드라머」로 방송되고 또 영화화되기도 한 장모와 기생 강명화와의 사랑과 정사도 이와 같은 시대변천이 낳은 「로맨스」였고 명기라 불리던 한남권번의 김모 기생의 자살소동도 같은 것이었다.
양장차림에 양산을 오똑하게 받쳐들고 인력거위에 올라앉은 기생의 모습 속에는 이미 서화와 기예를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워 조신하게 처신하던 옛 명기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 풍진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은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같구나.』 기미3·1만세이후 퍼지고, 이 무렵 유행된 희망 가는 뜻 있는 사람에게는 물론, 옛 추억을 더듬는 명기의 마음을 더욱 사무치게 하기만 했다. <계속> 【이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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