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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연금 20만원 꼭 필요한 사람에게 더 갔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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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내가 자란 지방도시 동네 언덕에 시립양로원이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그래서 우리 마을은 ‘양로원 동네’라 불렸다. 한국전쟁 후 미군이 지어준 양로원이었는데, 운영 면에서도 미군부대 신세를 많이 졌다. 추수감사절·성탄절에는 미군들이 밀가루 부대·옥수수빵·가루우유·과자·사탕을 트럭에 산더미처럼 싣고 왔다. 불우한 노인들에 묻어서 아이들도 혜택을 입었다. 딱딱하게 굳은 우유를 먹고 배탈 난 기억이 있고, 씹는 담배를 과자로 알고 입에 넣었다 기겁한 적도 있다.

 가난하던 1960년대. 나라 살림 꼴로 감당 안 되기에 남의 나라에 손을 벌렸다. 우리 어르신을 우리 손으로 부양하지 못한 것이다. 양로원 마당에서 친구들과 놀다 노인들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만날 꽁보리밥에 멀건 국, 신 김치였다. 돌아가시면 컴컴한 창고방에 하루 이틀 모셔두다 연고자가 안 나타나면 가마니 덮고 손수레에 실어 공동묘지로 옮겼다. 철없는 아이들은 밤중에 시신이 모셔진 창고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담력내기 놀이를 했다. 늦게나마 왜 죄송하지 않겠는가. 1965년 기준, 65세 이상으로 치면 당시 양로원 노인들은 대개 1880~1900년 출생이었다. 구한말에 태어나 망국, 식민지 수탈, 6·25전쟁, 독재를 차례로 겪은, 근·현대사상 가장 불행한 세대다. 도대체 경제발전의 열매라곤 단 한 모금도 맛보지 못했으니, 그분들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가난’과 ‘고난’뿐이다.

 비록 노인 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미 세상을 뜬 그 시절 노인보다 나을 것이다. 지금 한창인 기초연금 논란을 이런 세대 관점에서 바라볼 수는 없는가. 개인적으로 공약 이행보다 장기적인 재정 부담 완화가 우선이라고 본다. 그래서 일종의 고육책인 정부안에 수긍한다. 꼭 필요한 사람 순서로 지원해야 한다. 60년대 양로원 세대의 희생을 딛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일어섰다.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지금 세대가 선배들 희생의 절반이라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둘러보면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원로 서양화가 곽훈(72)씨는 65세가 한참 지났지만 지하철 요금을 꼬박꼬박 낸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능력 있는데 공짜로 타면 사람이 처량해 보이지 않겠는가”라고 그는 말한다. 며칠 전 TV토론에서는 서울대 오종남(61) 교수가 “몇 년 후 정부가 나보고 20만원을 받으라 하면 20만원 이상의 걱정이 들 거다. 나는 20만원 안 받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20만원이 누구에겐 200만원처럼, 누구에겐 2만원처럼 쓰일 수 있다. 안 그래 보이는 사람들마저 약자고 을(乙)이고 가난하다고 외치는 풍경은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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