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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판 조용해도 투표율 72% … 정책 연속성 돋보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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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호 08면

손학규 상임고문(오른쪽) 과 박명림 교수가 24일(현지시간) 베를린자유대 한국학연구소에서 만나 대담하고 있다. 베를린=이상언 특파원

▶박명림 교수=이번 총선은 독일 내부뿐만 아니라 유럽, 특히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8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죠. 그런 점에서 한국의 언론과 지식인들도 크게 주목했습니다. 이번 선거 결과를 어떻게 해석합니까?

특별 대담 현지서 본 독일 총선

▶손학규 고문=저는 이번 선거에서 통합과 민주주의를 봤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메르켈이 모든 것을 다 먹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원전 폐기, 육아보조금 지급 등 좌파적 정책을 적극적으로 채택했습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받아들이는 통합의 리더십이 힘을 발휘했다고 봅니다. ‘무티(Mutti·엄마)’라는 별명을 가진 메르켈의 ‘어머니 리더십’이 거둔 승리입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박=야당 정책이라도 메르켈은 나라에 이익이 되고, 국민이 원하면 적극 수용해 왔습니다. 한국 정치에서는 소리 지르고, 편 가르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메르켈은 겸손하고, 기다리고, 신중하고, 포용하고, 타협하는 리더십을 보였죠. 그래서 ‘메르켈리즘’이라는 용어까지 나왔습니다.

▶손=통합은 독일 정치의 오랜 전통이죠. 1949년 정부 수립 뒤 독일에선 예외 없이 연립정부가 들어섰습니다. 1957년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끄는 기민당이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했지만 그때도 다른 당을 포용해 연립정부를 구성합니다. 프로이센을 이끈 비스마르크의 정치도 통합의 정치였습니다. 다른 세력과의 동맹·연대를 통해 통일을 이뤄나갔고 복지제도 도입으로 사회 통합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통합의 바탕에는 독일인들의 연대와 공동체 정신이 깔려있습니다.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

▶박=독일 선거에선 한국처럼 여야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기 힘들죠. 독일 정치권이 지향하는 기본적 가치에 대한 합의를 이미 거의 이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복지·민주·법치·사회라는 공통의 합의 기반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손=독일 기본법의 제1조는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될 수 없다’는 겁니다. 기본법 제20조에는 ‘독일연방은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국가’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한 공동체적 합의가 이미 이뤄져 있는 겁니다.

▶박=과거에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는 2003년 우파가 제안한 ‘비전 2010 정책’을 수용했고, 메르켈은 좌파의 정책을 받아들여왔습니다. 독일은 오랫동안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이념 갈등을 줄이는 정치를 해왔는데, 오늘날 그 혜택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손=이번 선거 때 고소득자에 대한 소득세율 인상, 최저임금제 도입 등의 복지 관련 논쟁이 있었죠. 하지만 복지의 큰 틀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분인 탓인지 이슈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복지제도를 도입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접근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박=진영 논리, 이념적 상호 공방, 자극적 스캔들로 뒤덮이는 한국 선거와 달리 독일 선거는 정책과 리더십 평가 중심으로 진행되는 게 인상적이었죠.

▶손=포용과 통합의 정치에는 강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메르켈은 TV 토론에 나오기 전까지 야당인 사민당 대표인 페어 슈타인브뤼크의 이름을 공개석상에서 한 번도 거명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야당을 공격하거나 비난하지 않은 거죠. 힘을 가진 측이 관용과 포용의 정치를 펴야 통합의 정치가 이뤄집니다.

▶박=독일 사회가 통합적 정치를 하는 데에는 ‘중간 집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싱크탱크, 노동조합, 시민단체, 종교조직, 학계 등에 중간 집단들이 두텁게 포진해 있고, 독일 언론도 이념적·논쟁적 보도보다는 비전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결여돼 있는 게 중간 집단의 자율성·책임성·구체성·정책 대안성·균형성인 것 같습니다.

▶손=비스마르크가 통일을 이루기 이전에 심각한 분열을 겪고도 나치의 등장, 제2차 세계대전 등을 경험했죠. 이런 파국을 몰고 온 당파주의나 극단적 사고를 피하려는 생존 본능 때문에 균형적 시각을 가진 중간층이 폭넓게 형성된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박=독일 정치의 특징 중 하나는 정당 간 연합에 의한 정책의 연속성입니다. 기민당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총리 때는 대연정에 참여한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부총리를 맡고, 브란트 밑에서 일했던 사민당의 헬무트 슈미트가 집권했을 땐 자민당의 한스디트리히 겐셔가 통일 정책을 관장하는 등 연정을 통해 정권의 수명을 뛰어넘는 정책의 지속성이 보장돼 왔습니다.

▶손=메르켈의 원전 폐기도 연정에 의한 정책의 연속적 통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원전 폐기는 원래 녹색당의 정책이었는데, 슈뢰더 총리 시절의 사민-녹색 연정 때 사민당의 정책으로 흡수됐습니다. 그리고 메르켈 정부 1기 때 기민-사민 연정으로 다시 내각에서 논의되기 시작했고, 비록 그 연정이 끝난 다음이지만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계기로 메르켈이 폐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녹색당의 정책이 두 차례의 연정을 통해 기민당의 메르켈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겁니다.

▶박=이번 총선 결과 중 주목되는 하나는 기민당의 우파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FDP)의 몰락입니다. 4년 전 93석을 얻었으나 이번에는 한 석도 얻지 못했습니다. 독일 정치학자들은 “유권자들이 ‘우리는 미국과 다르다’고 외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주장하는 자민당에 대해 독일인들은 사회민주주의 지지 의지를 표현했다는 겁니다. 또 일부 학자는 ‘자민당의 기업 경쟁력 강화 정책들이 이미 기민당과 사민당에 흡수돼 독자적 세력의 토대가 약화됐다’고 봅니다.

▶손=자민당의 시대적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됩니다. 자민당이 추구하는 자유주의의 기본 가치는 독일 사회에서 이미 거의 보편화됐고, 신자유주의나 자유방임주의는 유럽, 특히 독일에서 설 땅을 찾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박=차기 독일 정부는 기민-사민이 연대하는 좌우 대연정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독일 학자나 언론인들은 이번에 세 번째 대연정이 실시되면 ‘21세기형 독일식 복지국가’라는 새로운 국가 비전의 정립에 역량을 모을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고 봅니다.

▶손=대연정이 가능한 배경은 사회의 통합, 정치권에서의 가치 수렴화, 국민의 안정·번영에 대한 바람입니다. 대연정이 성사되면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독일에 대해 더욱 위협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파인 기민당과 좌파인 사민당이 연대를 하고 독일이 똘똘 뭉치면 못할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박=이번 총선 투표율은 72%가 넘었죠. 우리나라 총선보다 높은 투표율입니다. 선거판은 조용하지만 시민들이 정치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현실을 말해줍니다.

▶손=결국은 민주주의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서로 타협하고 통합을 이루는 게 핵심입니다. 독일이라고 해서 우리에게 없는 특별한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가치들을 조금 더 잘 실천하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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