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이중성 … 위안부 문제는 빼고 여성인권 강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21세기에도 분쟁지역에서 여성에 대한 성적 유린이 자행되고 있는 데 분노를 금할 수 없다.”

 2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68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한 말이다. 그는 이어 “분쟁지역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을 물질적·정신적으로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아베는 이를 위해 앞으로 3년간 30억 달러(약 3조3000억원)가 넘는 공적개발원조(ODA)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총회장 객석에선 박수 대신 침묵이 흘렀다.

 아베 총리는 이날 유엔총회 연설의 절반을 여성 관련 이슈에 할애했다. ‘아베노믹스(Abenomics)’라는 자신의 경제철학에 ‘우머노믹스(Womanomics)’란 신조어까지 붙였다. 여성의 힘을 활용해 침체한 일본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과거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 역사에 대해선 끝까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베는 일본이 공격받지 않아도 동맹국이 타격을 받았을 때 전쟁에 나설 수 있는 ‘집단적 자위권’에도 집착했다. 그는 유엔의 평화유지활동(PKO)을 언급하며 “어떤 나라도 지금 단일 국가 힘만으로 스스로의 평화와 안전을 지킬 수 없다”며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관점에서 국제사회 평화 이슈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강조했다.

 다만 아베는 지난해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전 총리와 달리 영토 문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지난해 노다는 유엔총회 기조연설 후 기자회견에서 독도와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섬 영유권을 노골적으로 주장해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샀다. 최근 잇따른 역사 왜곡 망언으로 동북아시아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자 한·중 두 나라와 관계 개선을 위해 민감한 영토 문제를 피해간 것으로 보인다.

 대신 북한을 겨냥했다. 그는 “북한 핵무기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다”며 국제사회가 납득할 수 있는 비핵화 조치를 내놓으라고 촉구했다. 이어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관련, “내가 집권하는 동안 완전하게 해결하고 싶다”며 “납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는 있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베의 기조연설 후 일본 측의 요청으로 한·일 외무장관 회담이 열렸다. 사실 한국은 물론 중국과도 정상회담을 열지 못하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몸이 달았지만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분쟁지역 여성의 성폭력 피해를 규탄한 아베 총리의 기조연설을 먼저 화제에 올렸다. 양국 간 과거사 문제를 하루속히 해결하자는 한국 정부 입장도 전했다.

 그러자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장관은 후쿠시마(福島) 원전 주변 8개 현의 수산물에 대한 한국의 수입금지 조치 해제를 요구하고 나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법적으로 해결된 일”이란 입장을 되풀이했다. 양국 외무장관의 발언은 평행선을 달렸다. 애초 30분으로 예정됐던 회담은 성과 없이 50여 분으로 길어졌다.

 윤 장관은 아베 총리가 강조한 ‘적극적 평화주의’에 대해서도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우려하는 주변국의 입장을 전했다. 그러면서 일제 강점기 한국인 강제 징용의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규슈·야마구치 공업단지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도 적절치 않다고 날을 세웠다.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선 일본 측의 역사인식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정부 입장을 분명히 한 셈이다.

 그러나 기시다 장관도 물러서지 않았다. 회담 후 양국 외무장관의 표정은 어두웠다. 기시다 장관은 일본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도 짧게 몇 마디만 한 뒤 자리를 떴다. 윤 장관도 회담 결과에 대해 “보도자료를 낼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한국 정부는 다음 달 17∼20일 열리는 야스쿠니(靖國)신사 추계제사 때 아베 총리가 참배할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이에 대한 명쾌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한, 당분간 한·일 관계 개선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