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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지 외신부장 방문기(상)|하노이에서 8일간|루크지=본사 독점전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미국의 권위 있는 격주간 교양지「루크」최신 12월 29일호의 생생한「하노다」보고를 통해 타협을 부정하는 공산 월맹 정부와 인민들의 월남 전쟁 관을 자세히 파헤쳤다.「투크」지 편집장「윌리엄·B·아더」씨와 함께 8일간「하노이」를 방문한 동지 외신 부장「J·로버트·모스킨」씨는 미국 과 월남과의 화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어떤 실마리도 찾아보지 못 했다고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모스킨」외신 부장의「하노이」방문기를 상·하 2회에 걸쳐 여기 소개한다. 월맹 인들에게서 받은 인상은 퍽 완고하고 호전적이며 광신도들에게서 흔히 느끼는 열기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세계를 흑·백으로 분별하려는 버릇이 있었다. 정치 국원이며 상위 실력자에 드는「레·둑·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들은 세계 최강이라고 일컫는 두개의 자본주의 국가,「프랑스」와 미국을 연달아 이긴 샘이다.』
사실 월맹의 지도자들은 단 두개의 목적밖에 생각지 않는다. 월남 안의 외국 군대를 철수시키고 이를 공격 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에게는 평화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단지 승리만을 바랄 따름이다. 그리고 적어도 이들 생각에는 승리가 목전에 다가왔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월맹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칼자루가 미국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월남인들은 자신의 민족사를 약 2천5백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일은 이들 조상의 생각이었고 이것은 불과 20여 년 전까지도 계속 되었다.
우리의 통역을 맡고 있던 40줄의 사나이는 일본 헌병에게 맞아 죽은 자기형의 얘기를 들려줬다. 자기가 열 아홉 살 적의 일이라고 말할 때의 그의 눈은 이방인을 전체에 대한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
우리를 초청해 준「루·퀴·키」신문협회장의 말은 이보다도 더 현실적이었다. 월남전과 평화 해결의 가능성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우리 민족은 말하자면 2천5백마일(4천km)을 걸어온 사람들이다.「닉슨」이 끝내 버틴다면 5년이고 10년이고 싸울 수밖에 없소. 2천5백 마일을 걸어 온 사람이 10마일쯤 더 걷는걸 두려워할 것 같으냐?』
처음 월맹에서 발행한「비자」를 받았을 때 우리는 적지 않이 놀랬다. 무슨 꿍꿍이 속인지 도시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하노이」를 떠나 귀국한 뒤 우리는 월맹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를 간과했다. 언론인의 힘을 빌어 미국 안의 여론을 좀 더 반전 적인 것으로 이끌어 보자는 심이었다.
어느 날 월맹 최대의 신문인「난·단」지의 편집국장「흥·뭉」에게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상호 관계에 대해 물어 봤다.
그의 대답은 의의로 간단 명료했다. 외세의 압제를 벗어나기 위한 반 식민 전쟁이 민족주의의 깃발 아래 출발된다. 이러한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소위 지주 지급과의 항쟁을 위해「마르크시즘」이 도입되며 단순한 우국에서 출발했던 반 식민 투쟁도「이데올로기」로 무장된다는- 식의 명쾌하면서도 아리송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곤혹은 그 뒤에도 몇 차례인가 겪어야 했다. 각계 각층에서 선발되어 온 청년 지도자들과「솔직한 의견 교환」을 하던 자리에서 였다. 호지명 청년 연맹 중앙위원회 총 서기 직을 맡고 있다는「부·캉」이라는 청년은 이런 얘기를 했다.
『봉건적 사회에서 해방된 뒤의 우리는 일체의 봉건사상도 타파 해 봤다. 예컨대 남존여비의 사상 따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전쟁 임무의 수행에서나 생산 목표 달성에 있어서나 남녀는 완전한 평등을 누리고 있다.』
남녀의「완전한 평등」에 대한 해석보다 더 재미있었던 것은 일반적인 생활 도덕에 관한 그들의 관념이었다. 이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들은『여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라면 좋다』고 대답했다. 이 경우「해방」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게는 통 이해가 가지 않는 단어였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인상을 줄까 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밖에「상무의 생명」과「합리적인 가족 계획」을 조건으로 인공 유산이 허가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결혼 전의 처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말했다. 그러나『혼전 성교가 허락된다는 얘기냐』는 나의 질문에 이들은 상당히 당당한 듯이 보였다.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결국 예의 아리송한 답변을 들고 나왔다.『사회에 대한 의무는 지켜 야죠. 혼전에 너무 방종한 생활을 하면 결혼 뒤에 불행해지는 수가 많으니까요.』우리들은「하노이」남쪽 1백40km 떨어진「기아푸」종장의 마을에 들어서자 온 동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구경」 과「환영」을 겸한 영접을 해줬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우리 두 사람은「프랑스」인이 철수한 이래 서양인으로서는 첫 손님이었다.
마을 곳곳에 호지명의 초상이 걸려 있었고「마르코스」·「레닌」의 사진도 듬성듬성 끼여 있었다. 그리고「스탈린」의 초상도 2, 3개 있는 것이 어쩐지 이상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1년에 2모작을 하면서도 이들의 생활은 그다지 넉넉한 것 같지가 않았다. 전기도 동력 경운기도 없었고 소위 문명의 이기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기아푸」마을은 지금까지 7차례의 폭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2명의 목숨을 잃었다는 예기와는 달리 외도 상의 피해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하노이」를 보고 가장 놀란 것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전혀 느낄 수 없는「조용함」에 대해서 였다.「하노이」에서는 거의 자동차를 몰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넓은 중심 가를 달리는 것은 거의가 자전거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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