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록 깨리라"이 악문 배해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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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륙 남단 윈난(雲南)성의 성도 쿤밍(昆明)의 2월은 따뜻했다. 1년 내내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날씨에 해발 2천m가 넘는 고지대는 육상선수들의 훈련장소론 천혜의 조건이었다. 이곳에서 한국 여자 마라톤의 기대주 배해진(24·서울도시개발공사)이 뛰고 있었다.

▶오전 5시-어둠을 헤치고

밖은 캄캄했다. "따르릉"하는 자명종 소리에 이어 팀내 최고참 윤선숙(31)의 "엉덩이가 왜 이리 무거워"라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다들 눈을 비비며 나온 곳은 첸궁 체육기지 운동장. 어둠을 밝히는 조명 속에서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5명의 여자선수들은 4백m 트랙을 힘차게 뛰었다.

새벽훈련은 무려 세시간이나 진행됐다. 단 1분도 트랙을 벗어날 수 없었다. 1천m를 3분2초 내로 주파한 뒤 60여초간 조깅속도로 가볍게 뛰곤 다시 2천m를 6분30초 안으로 뛰어야 한다. 최선근(52) 감독은 "이것 봐라, 래프타임이 늦어진다. 좀 더 힘내"라며 재촉했다. 세시간 동안 1백바퀴를 돌았다. 가뿐히 마라톤 풀코스에 버금가는 40㎞를 뛴 셈이다. 배해진은 "그냥 하루 정도 이렇게 뛰는 건 할 만하겠죠. 근데 근육이 뭉친 상태에서도 다음날 또 이 정도 뛰는 건 정말 몸서리가 쳐지는 일이에요"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후 3시-죽음의 산악코스

오후 2시30분, 해발 2천8백80m에 이르는 량왕산(良王山) 코스로 이동하는 버스안에서부터 선수들은 울상이 됐다.

"감독님, 제발 세번만 돌아요." "안돼, 일곱번은 돌아야지."

가파른 언덕코스를 5㎞나 뛰어야 한다. 조금만 뛰어도 숨이 막혀오는데 매캐한 자동차의 매연도 뿜어져 나왔다. 그래도 20분 내에 주파해야 한다.

목표점에 도달하자 최감독이 저승사자처럼 서 있었다. "자, 빨리 타. "

다시 버스에 올라타 출발지점까지 내려와선 "이번에 20분 내에 오지 못하는 놈은 한바퀴 더 돌리겠어"라며 눈을 부라린다. 세번째 완주하자 선수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배해진은 콧물에 눈물까지 흘리며 "감독님,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사정했지만 최감독은 한번 더 돌리고서야 "오늘은 이쯤에서 봐준다"라며 언덕을 내려왔다.

▶오후 7시-된장찌개로 속을 달래며

쿤밍으로 건너온 게 지난해 12월 23일이다. 크리스마스도, 새해 첫날과 설날도 이곳에서 보냈다. 배해진은 "하루도 쉬지 않고, 명절 때도 훈련했어요. 설날에 폭죽 쏘아 본 게 유일한 이벤트예요"라고 말했다.

한달쯤 지나자 중국음식 냄새도 맡기 싫을 정도가 됐다. 그러자 최감독이 요리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숙소 식당에서 배추.무 등을 가져와 김치도 담그고, 된장찌개도 끓였다. 최감독은 "애들은 발이 부르텄고, 난 음식 만드느라 손이 부르텄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배해진은 지난해 전국체육대회 하프마라톤에서 1시간12분13초로 한국 최고기록을 세우며 대회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된 바 있다. 이번의 그녀 목표는 3월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26분12초의 한국 최고기록을 깨는 것이다. 훈련 결과를 보면 2시간25분대는 충분히 나올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지독히 훈련했지만 결과는 또 모르는 거잖아요"라며 오히려 담담하게 말한다.

배해진을 비롯한 서울도시개발공사 여자 마라톤팀은 63일간의 중국 전훈을 끝내고 지난 25일 오전 4시30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기온은 영하를 가리켰지만 배해진은 "아무리 따뜻해도 중국에서 또 겨울을 보내고 싶진 않아요"라고 말했다.

쿤밍=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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