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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적치하의 3개월(6)|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 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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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하의 시련>(3)
기록을 보면 6·25 때1백43만6천명의 서울시민중 약40만 명이 수도가 북괴군에 피점 되기 전에 남으로 빠져나갔는데 그 가운데 8할이 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할인8만 명이 정부고관·우익정객·자유주의자·군인·경관의 가족이었다. 38이북에서 공산학정을 몸소 겪은 월남한 사람들은 본능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대거 피란 했지만 남한인 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다급한 절박감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물론 사태가 너무 급변해서 피란 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 큰 원인이기는 했다.
또한 서울에 남아있던 시민의 대부분이 시골에 피란 가 봤자 공산 게릴라나 폭도 때문에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생각에서 수도에 잔류한 것도 사실이었다. 북괴를 맞이한 잔류서울시민들의 형태는 대별해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는 투옥됐거나 지하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의 열광형 적인 환영형이고 ,둘째는 가장 다수를 차지한 기회주의적인 정관형이고 , 세째는 채 미처 피난가지가지 못한 인사들의 지하잠복형이었다.

<빈 물독 속서 수색피해>
모윤숙 여사로부터 적치 하 3개월의 체험담을 쭉 들어보면, 이 세 가지 유형의 인간상의 변모하는 과정이 선명하게 부각된 것을 볼 수 있다. 첫째의 경우는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제일 수가 많은 둘째의 정관형의 기회주의자들의 경우, 심적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셋째의 잠복형의 경우는 개인차는 있겠지만 인간의 인내 한계점이 어디까지냐를 측정할 수 있는 한 버로미터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모윤숙 여사의 수난담 마지막 회분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광주 모랫골 산골에도 어느새 가택수색선풍이 불어 어느 날 밤, 괴뢰군이 갑자기 들어 닥쳤어요. 신 영감은 얼른 부엌으로 와서 나를 마른 풀잎 단속에 감추어주어서 무사했습니다. 그 이튿날 밤에도 괴뢰군은 또 왔는데 이때는 신 영감이 빈 물독 속에 들어가라면서 큰돌을 머리 위에 얹어놓았어요. 그자들은 어젯밤에 내가 숨었던 풀잎 단을 칼로 쿡쿡 찔러보고는 그냥 갑디다. 신 영감은 여기가 이제 위험하니, 고개 너머 사촌 집에 잠깐 가 있으라고 데려다주었어요. 1주일쯤 그 집에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 도토리·고염 등으로 연명했지요. 잠은 외양간에서 자고….
다시 신 영감 집에 왔을 때 뜻밖에 운전사 김씨와 낙산 집 사위가 기다리고 있어요. 김이 무서운 얼굴로 대뜸 대한민국은 망했다. 네 친구들도 다 자수했어. 우리를 따라와 내무서로 가자 라고 반말지거리로 윽박지릅디다. 자수는 안 하겠다 고 했더니 4지를 들고 나가 논바닥에 메치면서 따귀를 때리고 짓밟아요. 참 기가 막힙디다.
운전사는 너 태우고 다녀서 나도 죽게됐어. 난 내무 서에 자수를 했는데 너를 앞세우고 가야 내가 산다 하고 고함을 칩디다. 이때 신 영감이 달려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쩡쩡 울리는 목소리로 공산당도 사람이면 인정이 있어야 할게다. 이렇게 서로 잡아먹는 법이 어디 있다더냐고 호령합디다.

<풀·나무껍질 먹으며 연명>
운전사는 펄떡 주저앉으며 자기는 이재 내무서의 끄나 불이 돼서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갖은 고생 끝에 이 녀석들한테 잡혀가다니… 하고 생각하니 더욱 분하고 기가 막힙디다.
내가 엎어진 채 꿈쩍은 안 하니까, 김은 내무서원을 데려와야겠다면서 산을 내려갔어요. 이틈을 타서 무작정 산등성이를 향해 달렸죠. 비틀거리며, 얼마를 뛰다가 남한산의 어느 골짜기에 닿았읍니다. 이때부터의 생활은 완전히 짐승이에요. 아무 풀이나 나무껍질을 닥치는 대로 뜯어먹어 얼굴은 부황이 나서 붓고, 설사가 그칠 사이가 없었지요.
참, 배고픈 것만큼 더 심한 고통이 없더군요. 세끼 굶으면 도둑질 안 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참 명언이에요. 이제는 죽어야 할 때가 왔나보다 하고 허리춤에 간직했던 극약을 꺼내 보았습니다. 형태는 그대로 있지만, 땀에 젖고 부스러져 있어요.
이때 수염이 무섭게 자란 한 남자가 누더기를 걸치고 지나가면서 이제는 국군이 입성하게 된다 고 밑도 끝도 없이 떠들며 지나가요. 반 실성한 사람이에요. 하긴 그 사람 눈에는 내가 실성한 것처럼 보였는지도 모르죠.

<춘원 편지 잃고 죽도록 사모>
이렇게 산에서 헤매다가, 그 동안 소중히 간직했던 춘원선생과 장기제씨의 편지 7통을 몽땅 잃어버렸읍니다.
배고픔, 고독, 밤과 새벽의 추위 속에 죽어 가는 몸이면서도 그 사람이 보고싶어 죽겠어요. 갑자기 그분이 북으로 끌려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고‥ 또 청량리로 홀로 간 딸의 모습은 아프도록 가슴을 파고들고요.
멀리 산 속에서 전투가 벌어졌는지 총소리가 요란히 납디다. 이튿날 그 쪽을 지나가다가 국군 위계 급장을 단 청년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어요. 잘생긴 얼굴이 아직도 변색이 안 된 듯 하늘을 보고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것 같아요. 나는 무당처럼 환각 속에서 젊은 소위의 주검 앞에서 시를 읊었읍니다.
산 옆 외 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려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
후략 (주=이 시의 제목은『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모윤숙 선집에서 발췌. 이 시는 한때 중학교교과에 실렸고, 6·25때마다 방송으로 낭독되고 있다.)
이러다가 또 한 고개를 넘어 갔을 때 바지저고리로 변장한 20세 안팎의 북괴군 3명을 만났어요. 총을 거꾸로 맨 이들과 3일 밤낮을 산 속에서 지냈읍니다. 모두 함경도 단천 청년들인데 그중 한 녀석은 나를 보고 자기 고모 같다면서 무척 따라요. 나도 고향이 이북이어서 가려고 한다고 거짓말을 했더니, 절대로 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 자는 허탈상태로 김일성에 속았다 면서 국군을 많이 속였으니 이제는 자기들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세 낙오 괴뢰군과 콩 구워 먹어>
이때만은 주의도 사상도 편도 없이 모두가 대한의 아들들 모습이었고 서로 따스한 인간미로 통했어요. 이 청년들이 밭에서 콩을 꺾어와 불에 구워 함께 먹었읍니다. 그때 콩 맛이란 참 꿀맛이었지요.
이들과도 헤어진 다음, 내가 있던 계곡의 양쪽 산에서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전투가 시작됐어요.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니까, 피아의 게릴라들 싸움인줄 생각했죠. 이때 나의 위치는 괴뢰군 쪽에 더 가까이 있었어요.
몸도 마음도 더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죽고만 싶었어요. 인내의 한계점에 도달한 것이죠. 마지막 순간에 딸 모습이 아롱거렸지만 그 애는 그 애대로 살아가겠지 하는 체념이 듭디다. 약을 꺼내서 입에 물고 침으로 삼켰습니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었지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어요. 어렴풋이 정신이 드는데 누가 발길로 툭툭 걷어차며 영어로 스파이 같은데 라고 해요.
나는 노노를 연발하면서 눈을 떠보았더니 미군들이에요. 극약이 그 동안 땀에 젖은 데다 부서져 약 기운이 약해져서 살아난 거지요. 이때 미군과 함께 있던 오모 소령이 나타나서 나의 신분을 알았습니다. 곧이어 17연대의 백인엽 장군부대로 인계되면서 모윤숙이가 살았다는 보고가 정일권 참모총장과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올라갔어요. 부산서는 내가 적에게 잡혀 사지를 찢겨 죽었다는 소문이 났대요. 이대통령은 정 참모총장에게 직접보호 해주라고 지시해서 수원으로 가서 정 총장을 만났읍니다. 다시 백인엽 장군 지프차를 갈아타고 서울에 들어왔지요.

<박순천·김상돈씨 만나 오열>
서울에서 김창용장군(고인)이 적치 하에서 고생한 인사들을 소공 등의 어느 빌딩 지하실에 모이도록 했어요. 내가 먼저 가 있으니 박순천 여사가 들어와 두 손잡고 우는데 김상돈씨가 장발장처럼 수염을 기르고 옵디다. 그 동안 천장 속에 숨어있었대요. 며칠 있다가 아마 9월 30일인데 경무실에 가서 이 박사를 만났습니다. 어찌나 분한 생각이 가슴에 북받치는지 곧장 달려들어 넥타이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렸어요. 마구 행악을 했지요.
할아버지, 도대체 나를 그렇게 부려먹고, 막판에는 방송을 시키고 혼자만 살려고 피란 가기예요 하고 바락바락 악을 썼읍니다. 할아버지, 나는 분해서 못 살겠어요 하면서 복도를 대굴대굴 뒹굴었어요. 그랬더니, 옆에 있던 프란체스카 여사가 나를 보고 좀 점잖게 고정해요 하며 못마땅해해요. 내가 지금 예의 찾게 됐느냐고 이번에는 부인에게 대들었읍니다. 이 박사는 숙연한 표정으로 눈을 껌벅 껌벅 하면서 나도 피란을 가려고 갔어야지. 그날(27일) 헌병이 넷 와서 내 사지를 번쩍 들어 태워서 갔어 라고 변명합디다. 그러면서 신성모 국방을 부르더니, 윤숙이 딸애를 전국을 뒤져서라도 빨리 찾아 주라고 특명을 내리더군요.

<철원서 방아찧던 딸 찾아>
10월 초순에 철원근방의 어느 시골집에서 방아찧던 경선이를 군인들이 찾아와서 모녀가 2개월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10월 중순께 맥아더 사령부에서 내가 적치 하에서 헤맨 것을 기록영화로 찍겠다고 해서 미군보도반원 20여명과 함께 숨어있던 코스를 다 다녔지요. 특히 모랫 골에 갔더니 온 마을이 발칵 뒤집혔어요. 신 영감님의 딸은 나를 피합디다.
그러더니 1주일 후에 어떻게 알았는지 회현동의 내 집으로 아기를 업은 채 찾아와 죽을 죄를 졌다면서 막 울었어요.
신 영감님에게는 집을 수리해주고 소와 농토를 사주었지요. 그밖에 신세진 분들에게도 인사를 차렸구요.
나를 배신했던 허○○여인은 문단의 다른 분들에게도 몹쓸 짓을 해서 수복후사형을 받았지요. 그러나 여러 문인들이 감형운동을 해 20연형이 됐다가 보석으로 나왔지만 병원에서 죽었어요. 운전사 김씨는 북괴군의 소위 의용군에 지원해 나갔다가 탈출, 폐병에 걸려서 나를 찾았길래 성모병원에 입원시켜주었지만 죽었어요. 지금 와서는 그때 은혜 진 분들과의 사이가 좀 이상해 졌어요. 자꾸 신세진 대가를 더 보장하라는 거지요.
은수의 피안에서 인간의 무상과 애석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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