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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적치하의 3개월(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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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인민 재판>(상)
북괴가 남한일대를 강점하고 실시한 정책에는 두 가지 특색이 있었다. 그 하나는 점령지역의 인적·물적 동원을 서둘러 재빠르게 전력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소위 [해방전쟁]이라고 일컬었음에도 불구하고 점령지역에 대해 가혹한 공포의 [군정]을 실시했다는 점이다. 전력화가 빨랐다는 것은 행정조직의 설치와 그 기능발휘가 그만큼 신속했다는 의미인데 북괴가 남한점령지역에서 강행한 정책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로 북괴는 남노당 출신분자로 미리 점령지역 군정요원을 육성 조직해두었다가 이들을 군과 함께 현지에 진출시켜 신속히 지방의 행정기구를 장악했다.
둘째로 동리위원들 대부분은 현지에 잠복해 있던 공산당원이나 용공분자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말단시책에까지의 침투가 재빨랐다.

<2만여명으로 치안부대>
세째는 미리 준비한 치안부대를 배치하여 군정의 뒷받침으로 삼았다. 이 치안부대는 약2만4천명의 병력으로 12개 연대의 48개 대대로 편성돼 있었다.
기간요원은 북괴군출신으로 충당됐지만 그 밖의 대원은 현지의 당원과 용공분자·조노원 등으로 채웠다.
네째는 통상적인 사법 경찰위에 공산당 특유의 검찰조직을 설치했다. 이 조직의 말단은 각 부락이나 직장단위로 배치되어 밀고제도와 주민조직의 확립에 따라, 주민의 강시와 반대분자의 적발에 임하였다.
이렇게 해서 북괴는 남한점령지역에서 삽시간에 공산체제를 확립하고 인적·물적 총 동원을 실시했다. 북괴가 총동원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갖가지 수법을 구사했지만, 그들 군정의 기본 요강은 피치자의 공포심조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 공포심조성의 가장 효과적 무기로 사용한 것이 소위 [인민재판]이었다.
그럼 이제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북괴군은 어떤 심정으로 그리고 서울시민은 어떤 표정으로 이들을 맞이했는가를 전 북괴군 [탱크] 장교로부터 잠깐 들어보기로 하겠다.

<서울시민들 냉냉한 반응>
▲오기완씨(전 북괴군 제105 [탱크]사단정치장교=대위·1962년 귀순·현○○부대근무·42) 『미아리 고개를 넘어 창경원을 거쳐 시내로 들어오니 등이 훤히 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전쟁의 발걸음으로, 그것도 외족 아닌 동족의 손에 의해 열려진 전쟁의 문을 봉해서 밟게 되는 수도 서울…나는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지요.
서울은 과연 어떤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할 것인가? 아직까지는 별다른 큰 저항은 받지 않았지만, 서울시내에서는 격전이 벌어지리라고 예상하고 바짝 긴장했습니다. 그러나 내 앞에 전개된 서울의 풍경은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어느결에 나붙었는지 북괴군입성환영의 [포스터]와 깃발이 군데군데 있어요. 이것이 참된 서울의 표정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소위 [조국통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탱크] 부대로 밀고 내려온 [정치요원]에게는 일종의 경리요, 감격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곧 대부분의 시민들은 냉냉하고 생기가 없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지요. 철모르는 어린아이들만이 호기심과 공포에 엇갈린 눈초리로 거리를 쏘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구요.
하루 이틀 지나는 사이에 서울시민들은 혼란 된 전국 속에서나마, 자기 살길을 찾아 헤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얼굴에는 전국의 추이를 살피는 조심성이 역력히 나타내 보이더군요.

<취사 돕게 안맹원들 동원>
서울에 들어온 다음날 아침(6월29일)에 나는 정치부사단장 김동수 대주(주=수원남방서 폭사·본 연재68회 참조)의 부름을 받고 박대위와 함께 갔습니다.
전대좌 이야기는 오늘 부대취사를 도와준다고 여맹원 10여명을 보내왔는데 둘이 요령껏 심사해 보라는 것이예요. [인민위원회]에서 솔선 도와준다고 나온 것을 안 받아들일 수 없고, 그렇다고 잘못하다간 식사에 독약이라도 넣으면 큰 일이 아니겠느냐고 해요. 될 수 있으면 그대로 돌려보냈으면 하는데, 여하튼 둘이 알아서 잘 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와 박대위는 대기실에 갔는데 거기 놓여 있는 여맹원들을 보고 우선 놀랐습니다. 모두 20안팎의 처녀들인데 세련된 옷맵시와 우아한 모습에 놀랐지요. 이북여성에 비하면 정말 세련돼 보입데다.
[동무들 어떻게 왔소?]
나는 될수록 표정을 부드럽게 가지려고 애쓰면서 물어보았지요. [저, 선생님들을 도우려고요]하고 나이가 제일 들어 보이는 여자가 말을 받읍데다. 선생님이라는 말이 좀 귀에 거슬려 [우리는 선생이 아니니 동무라 부르시오] 하니까 [저, 그럼 동무들을…] 하다가 자기들끼리 쳐다보며 낄낄대고 웃어요.

<아가씨들 멋에 마음 끌려>
[그건 그렇구 어디서 파견되어 왔소?] [용산구역 인민위원회에서 보내왔어요] 그러자 박이 옆에서 불쑥 한다는 소리가 [동무들이 도와주겠다는 건 고마운데 뭐 할 일이 있어야지] 하고 좀 튕겼어요. 그러자 그 여자들은 식사나 빨래 같은 것이라도 하고 싶다는 거예요. 도무지 식모와는 거리가 먼 여자들인 것 같고 해서 의심스러운 면도 있었지만, 그녀들 맛에 마음이 끌린 나는 부사단장의 의도와는 달리 어떻게 해서라도 붙잡아두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박대위는 끝내 쫓아 버리려고 해요. 박대위가 직업들이 뭐냐고 물으니까 모두 ○○대학생이라는 거예요.
그러자 박은 결심이라도 한 듯 우리가 필요할 때에는 구역인민위원회에 연락할 테니 우선 돌아가라 해서 이 문제는 결말이 났지요. 처녀들은 별로 표정도 없이 돌아가더군요. 내 생각에는 인민위원회에서 우리에게 아부하노라고 일부러 그런 여대생을 골라보낸 것 같아요.』
서울에 들어온 북괴병들에게 남한의 공산 및 용공분자들은 이렇게 갖은 아부와 환대를 베푸느라고 정신이 없었지만 양민과 반대자 숙청에는 조금도 가차없었다. 그 잔인 무도한 대표적 [케이스]가 김팔봉씨(68)에 대한 인민재판이었다. 구사일생으로 그 인민재판에서 살아남은 김팔봉씨는 20년 전의 일인데도 그 당시의 몸서리치는 체험을 놀랍게도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김팔봉씨 자택서 붙잡혀>
『나는 6·25때까지 의주로에서 애지사라는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었어요.
피란을 못 가고 있다가 북괴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겁도 나고 해서 나가 보지 못하고 2층 내방에서 밖을 내다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살폈지요. 7월1일엔 좀 갑갑하기도 해서 회현동의 최재서씨(영문학자·고인) 집에 가서 이야기를 좀하고 다시 계동의 친구집에 들렀다가 저녁 7시쯤 돌아와 밥을 먹고 있을 때입니다. 큰아들이 내방으로 올라오더니 수상한 사람들이 와서 아버님을 찾는데 안 계시다고 했다는 거예요. 일단 그자들이 돌아갔다가 다지 9시쯤 와서 찾는다는 겁니다. 아직 안 돌아오셨다니까 올 때까지 아래층에 기다리겠다고 하더래요.
나는 이제 잡혀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내의와 춘추복들을 두둑히 갈아입고 있었지요. 11시쯤에 장총을 멘 2명의 청년이 내 방문을 박차고 들어오면서 나를 보고 누구냐고 물어요. 마누라가 『시골서 올라온 친척』이라고 꾸며댔지만, 나는 일이 틀린 것을 깨닫고 [내가 이 집주인 김팔봉이요] 하면서 썩 나섰지요. 그랬더니 손을 들라면서 북창동 골목의 삼화인쇄소로 잡아갑데다. 그 건물이 바로 남노당 서울중구당부산하 출판노조의 사무실입데다. 벌써 내 인쇄소의 문선과장 이모씨가 잡혀 와 있어요. 나와 이씨는 밤새도록 한마디의 심문도 받지 않고 그냥 앉아서 새웠습니다.

<재판행렬에 군중합세>
이튿날 새벽에 동이 트자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러 창 밖을 내다보았더니 [인민재판소]라는 [플래카드]를 만들고 있는 것이 보여요. [아하 내가 말로만 듣던 인민재판을 받게되나 보다]라는 생각이 펄떡 들읍데다. 순간적으로 끔찍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위로하는 마음이 생긴 것도 사실이예요. 우선 피란 못간 사람이 나 뿐만 아니므로 많이 잡혀와서 함께 당할 터이니 좀 나을게고, 또 나는 8·15해방 후 글 한 줄도 안 쓴 인쇄장이요, 정부고관도 지낸 일이 없으니까 큰 변은 당하지 않으리라고 내 나름대로의 희망을 가진거지요. 좀 있더니 내공장의 인쇄공을 10여명 데려 왔어요. 그리고서 40∼50명이 [인민재판소]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나와 이씨를 그 뒤에 걷게합데다. [메거폰]을 든 자가 [인민재판]하고 선창하면, 나머지들이 복창하면서 대한문을 거쳐 시청 앞으로 나왔어요.
[옳지, 서울운동장으로 가는 구나.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잡혀와 있을 테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행렬은 광화문네거리까지 가다가 되돌아 시청 앞으로 오더니 다시 또 그 [코스]를 왔다갔다하는 거예요. 세 번인가 그렇게 반복했지요. 그러는 동안에 협진인쇄소, 또 무슨 인쇄소 하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군중이 합류해서 5∼6백명은 실히 됐어요. 모두가 강제 동원된 구경꾼들이지요. 이때서야 스스로 위로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깨끗하게 죽자]고 각오했어요. 그렇다면 [누구도 미워하지 말자] [아무도 원망하지 말자] [또 한 48세 밖에 못 살았다고 한탄하지도 말자] 라는 세 가지 생각을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명심불망하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설레던 마음이 많이 가라 앉읍데다.
상오 11시쯤(7월2일) 지금의 국회의사당 앞에 행렬이 멎더군요. 서울신문사 쪽을 향해 [인민재판소]의 깃발을 세우고 구경꾼들을 죽 세워놓은 다음, 어떤 젊은 녀석이 나서서 [지금부터 인민재판소를 개정한다]고 선언합데다.』 <차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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