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서스」고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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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오늘 시행되는 인구와 주택 조사의 유래는「로마」제국이 5년마다 하던 센서스 제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호구 조사였다.
가족 단위로 사람 수효와 재산을 조사해서 신분을 결정하고 의무를 부가하는 자료로 썼다. 그러다가 「로마」제국이 붕괴하자 「센서스」제도도 흐지부지 됐다.
그렇다고 호구조사· 인구조사·재산조사 따위를「로마」제국이 발명한 것은 아니다. 기원전 3천년쯤부터 「바빌로니아」·「페르샤」·중국 등지엔 벌써 그와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바빌로니아」의 경우는 인구보다도 농산물의 소출을 점검해서 세금을 거두는 자료로 삼았다·세금을 거두고, 징병 자료로 쓰고, 부역을 매기는데 센서스는 절대 불가결의 것이었다.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인원과 그렇지 못한 인원을 따로 파악하기 위한 조사는, 유태인들이 천벌이 내리는 수가 있었다. 다윗 왕의 명령을 받고「조압」이 시행한 병력조사 때 그랬다. 그래서 구약을 읽은 기독교인들은「센서스」에 대해서 근세까지도 과히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수가 있었다.
지금도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센서스기록은 11세기 초엽(1066) 영국을 정복한「윌리엄」1세의 악명 높은 「둠즈데이·북」(Domesday Book) 세금을 수탈하기 위한 일종의 토지대장이었지만, 어찌나 정밀했던지 민가에서 기르는 닭의 머리 수까지 기록돼 있다. 그래서인지 18세기 중반의 영국 하원 의원 중에서까지도 인구를 조사하다가는 큰 천재나 괴질이 돌지도 모른다고 떠는 사람들이 있었다. 말하자면 극히 개명한 나라에 있어서도,「센서스」는 터부였다. ???? 통치를 받던 시절의 유대인들이나 일제 36년 동안의 우리에게 식민 통치 기관이 강요하던 센서스가 썩 달가왔을 리가 없다.
그러나 19세기초부터 세계 각국에서 시행해 온 현대적 의미의 센서스는 그 내용에 있어서 로마제국의 그것이나, 저「둠즈데이·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즉, 과세나 징병 자료 파악이 그 목적이 아니라, 나라 정책을 세우기 위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센서스를 금기시 할 이유는 없고, 그 정확성을 보장하는 기술을 닦는 것이 온 국민의 의무가 되었다, 정확성이 없는 어림짐작 센서스는 백해무일리-모두 센서스에 협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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