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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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런데 영친왕은 타고난 인덕이라고 할까. 그분에 대해서는 일찌기 악구를 하는 사람을 본 일이 없다. 필자가 나중에 영친왕을 본국으로 모셔오느라고 일본에서 갈팡질팡할 때에 어느 관청의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영친왕의 일로 왔다고 하면 지위가 높은 상관으로부터 아래 하급관리에 이르기까지 이미 일본과는 아무 관계가 없게된 영친왕에 대해서 항상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무엇이고 잘해드리려고 애를 쓰는 것이 눈으로 보는 듯했다.
그리하여 아들 구씨의 졸업식을 참관하기 위하여 미국에 가셨을 때에도 의외의 인물로부터 예기치 않은 원조를 받아 크게 신세를 진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일본의 대영 사장 나가따·마사이찌(영전아일)씨 였다.
영전씨는 젊었을 때 나팔(허풍장이)이라는 별명으로 일활 영화회사 촬영소의 일개 안내원에 지나지 않던 사람인데 학력으로는 중학교밖에 나온 일이 없건만 분투노력으로 일본의 대표적 영화 제작자가 된 가위 입지전중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영친왕은 잠깐 졸업식만 보고 곧 돌아온다는 것이 아들을 보는 재미에 거의 l년 동안이나 미국에 체류하게 된 관계로 가지고 가셨던 돈은 벌써 다 없어지고 돌아올 때 타고 올 비행기표조차 사기가 어렵게 되었을 때 하루는 이웃에 사는 이노구마·겡이찌로오(저태현일랑)화백이 찾아왔다.
이노구마씨는 일본에서 으뜸가던 양화가로 뉴요크에도 아틀리에를 가지고 있으며 동경에서는 영친왕 댁 바로 이웃에 살면서 틈만 있으면 영친왕에게 그림공부도 가르쳐 드리는 사람이었다. 그와 같이 절친한 사이이므로 영친왕은 그날도 이노구마 화백이 그저 놀러온 줄로만 알았었는데 이노구미씨는 좀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다고 하면서 주머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놓으며,
『이것은 나가따가 전하께 드리라는 것이니 옹색하신데 우선 써 주십시오.』
라고 하므로 영친왕은 의아하게 생각하고 봉투를 뜯어보니 그 속에는 내셔널·시티·뱅크 5천달러짜리 수표가 한 장 들어있었다.
영친왕은 깜짝 놀라서,
『아니, 나는 아직 나가따 사장은 만나본 일도 없는데 이 같은 큰돈을 주다니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소.』라고 하니 이노구마 화백은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나가따라는 위인은 본시 그런 사람입니다. 성격이 호방해서 남의 어려운 것을 보면 그대로 있지 못하는 성격인데 이번에 제가 전하께서 외국에서 고생을 하신다는 것을 이야기했더니 그게 될 말이냐고 자진해서 드리는 것이니 우선 보태 쓰시고 후일 귀국하셔서 갚으시면 될 것이 아닙니까?』
당시 나가따씨는 대영 작품 『라쇼오몽』(나생문)이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영화 아카데미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기분이 대단히 좋았을 때였지만 아무리 기분이 좋다고 하더라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누가 5천달러씩이나 거저 빌려준단 말인가? 나가따씨는 그 같은 사람이었다. 영친왕은 염치는 없었으나 이노구마씨의 권고도 있고 해서 우선 그 돈으로 옹색을 면하고 무사히 미국을 떠나 왔는데 일본에 돌아오신 뒤에 그 이야기를 듣고 필자도 감격함을 마지못했었다.
영친왕으로부터 그 말씀을 들은 후 필자는 『보통 빚과 달라서 그런 돈일수록 빨리 갚아야 됩니다.』고 여쭈었더니 영친왕도 『나도 마치 썩은 고기를 먹은 것 같아서 마음이 꺼림하다』고 하시면서 여러 군데서 원조로 들어온 돈이 마침 2천달러가 있는데 어떻게 할까 하시기에 우선 그거라도 갖다주고 성의를 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더니 옆에 있던 안동여사(영친왕의 동창생인 안동중장의 부인)가 당시 통산대신으로 있는 사또씨(좌등=지금의 총리대신)는 자기도 잘 알뿐더러 나가따씨의 친우이니 그 2천달러를 사또 대신에게 갖다주고 나가따씨에게 전달해 줄 것을 의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므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그후 사또 통산대신이 불러서 가보았더니 2천달러를 도로 내주며 『나가따를 불러다가 이 왕전하의 말씀을 전하고 우선 이거라도 받으라고 했더니 나가따는 껄껄 웃으며 내가 드리고 싶어서 드렸지 결코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니 이 돈은 도로 갖다드리시오 라고 합디다.』라고 하면서 『나가따라는 위인은 별로 큰돈도 없으면서 곧잘 그런 짓을 잘하는 사람이지요』라고 하면서 자기도 껄껄 웃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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