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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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당시 일본은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경제가 극도로 어려웠으므로 각종 세금이 많아서 영친왕이 저택의 본관을 참의원 의장관사로 빌려주고 삭 월세로 매월 30만원씩을 받았어도 실상 수입은 그 반액인 15만원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주일대표부의 요망도 있고 하여 먼저 집을 비워놓으려고 좌등 참의원의원장을 내어 보내고 나니 그나마 수입이 없게되어 영친왕은 더욱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주일 대표부와의 약속은 먼저 집을 비어놓으면 40만 달러에 사겠다고 하여 우선 20만달러를 선도 금으로 내고 나머지는 추후 받기로 한 것인데 웬일인지 경무대로부터는 그후 6개월이 지나도록 아무 회답도 없었다.
보나 아니 보나 이대통령은 동경에 있는 영친왕의 재산도 전부 국유이니까 살 필요가 없다고 해서 대표부의 요청을 묵살한 것이겠으나 우두커니 그 지시를 기다리는 영친왕의 형편은 하루가 급하였다.
해방후의 영친왕은 오랫동안 타고 다니던 자동차도 처분하고 양란재배를 위한 온실도 없애고 그렇게 즐기던 골프도 중지하여 생계비를 줄이기에 힘썼으나 가옥 세니, 부호 세이니 하여 한꺼번에 5, 6백만원씩의 막대한 세금이 나오는데는 딱 질색이었다.
아무리 해방전의 황족이라고 하더라도 세금이 밀리면 가차없이 집달사로부터 차압을 당하는 시대였으므로 영친왕도 그러한 경우를 여러 번 겪었으며 그럴 때마다 여기저기서 빚을 얻어서 겨우 창피만은 모면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때에 의외의 인물이 하나 출현하였으니 그는「노다·우이찌」(야전묘일)씨였다.
「노다」씨는 자민당 대 의사로 후일 자민당의 총재선거에 입후보까지 한 일이 있는 유력한 정치가인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던지 영친왕이 몹시 곤란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여 러번 예방을 했을 뿐더러 그의 보스인「요시다」(길전) 수상에게 진언하여 무슨 방법으로든지 영친왕을 구원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길전 수상은 이전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이던「하야시」(임번장)를 불러다가 당시 그가 책임자로 있던 전국은행연합회(한국의 은행집회소와 같은 것이다)의 교제비 속에서 매월 10만원씩만 영친왕께 드리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하야시」는 오랫동안 조선에서 관리생활을 하여 한국에는 특별한 관심이 있었을 뿐더러 영친왕에 대해서는 은근히 걱정을 하여오던 차에 다른 이도 아닌 길전 수상이 직접 그 같은 청탁을 하므로 하야시도 기꺼이 그후 5년 동안 매월 10만원씩을 꼬박 꼬박 영친왕께 드렸던 것이다. 이것은 길전 수상이 정부예산으로는 직접 원조할 수가 없으므로 궁여일책으로 그 같은 방법을 안출해 낸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다나까」(전중무웅)는 거의 반생을 조선에서 관리생활을 해온 사람으로 소위 제국대학(제대)이 아닌 사립대학(명대) 출신이건만 타고난 뱃심과 수완으로 정무총감까지 된 사람인데 오랫동안 경찰관계의 일을 하고 고등(사상) 경찰의 보스로 있었던 만큼 일반의 비판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고 민족 운동 자에 있어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건만 유독 영친왕께 대해서는 남 유달리 특별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 일본에 들어간 그는 일 찌기 정무총감을 지낸 전력도 있고 하여 조선에서 살다가 본국으로 쫓겨간 일본인회의 회장으로 있었는데 하루는 일부러 궁내청 장관을 찾아가서 『영친왕은 다른 일본 황족과 달라서 특별한 분인데 아무리 일본이 전쟁에 졌다고 하더라도 그런 분을 이대로 방치하는 법이 있소? 다른 황족들은 소위 신적강하를 해서 모른다고 하더라도 영친왕만은 남의 나라의 황태자를 억지로 끌어 온만큼 일본정부는 물론, 궁내 청에서도 그 책임을 다 해야할 것이 아니오』라고 항변하여 결국 일본의 천황도『그전과 달라서 국회의 승인이 없으면 돈을 마음대로 쓸 수가 없다』는 것을 한탄하면서 우선 천황자신의 용돈 중에서 매월 10만원씩을 증정키로 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영친왕의 인덕이라고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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