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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6·25동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동경 영친왕저에는 방문객이 빈번하였다. 그 중에는 재일 조선인 총 연맹의 김천해와 대한 민국 거류민단의 박렬씨도 있었는데 김천해는 해방 전부터 조선인으로서 유일한 일본 공산당원으로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석방된 사람이고 박렬씨는 1923년 관동대진재 때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고 했대서 무기징역을 받았다가 역시 해방 후 석방된 무정부주의자인데 다 각기 영친왕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즉 그들은 무슨 의논이나 한 듯이 한결 같이 영친왕을 최고고문으로 추대코자 하였으나 영친왕은 굳이 그것을 사양하였다. 본국이 38선으로 양단 된 것만도 분하겠거늘 무엇 때문에 일본에 와있는 교포들까지 남북으로 갈리어 서로 싸울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그때 영친왕의 생각이었는데 그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덮어놓고 나와서 함께 일을 하자고 졸라댔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됨으로써 38선은 더 한층 굳어지고 그 사이 송진우, 장덕수, 김구, 여운형씨 등의 여러 지도자가 전후해서 암살된 것을 보게되자 한때는 곧 환 국을 할까하던 영친왕도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는 절대로 귀국하지 않을 것이며 좌나 우나 정치적 운동에는 일체 관계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6·25동란이 일어나니 영친왕은 자기의 불길한 예감이 너무나 빨리 그대로 들어맞은 것이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였다.
당시의 사정을 영친왕비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아들 구가 미국으로 건너간지 40일쯤 전에 저 비극적인 한국동란이 발생했습니다. 38도선을 넘어 남하해온 북괴군과 이것을 요격하는 한국군 사이에 벌어진 싸움은 곧 유엔군의 개입을 가져와 그 후 1년 반 동안의 처참한 양상은 세계의 이목을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집 어른의 조국 (나에게 있어서도)을 엄습해온 이 폭풍은 제2차대전이 끝나 평화의 그 다음이 차츰 몸에 배기 시작할 즈음인 만큼 실로 통탄함을 마지못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흘 후에는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여 그곳에 계신 구 왕국 여러 분들의 안부가 몹시 근심되어 집 어른도 매우 마음 아파했습니다.
서울에는 한-일 합병당시의 국왕이시었던 순종왕비, 윤대비를 비롯하여 이건공(일본명 모모야마·겡이찌)의 아버님인 이강공(의친왕)님과 히로시마(황도)에서 원자폭탄으로 순직한 이우공 전하의 박찬주 비와 그의 두 아들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한국의 독립으로 왕공족의 대우를 상실하여 대비마마까지도 민간인의 집을 빌어 들고 있었고 구 왕궁은 정부에 접수되어 일반의 관람에 제공되고 있다는 등 종전 후 일본에 왔던 대비마마의 남동생 윤홍섭(전구황실 관리위원장)으로부터 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던 참에 이번에는 또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조선의 왕실에는 예부터『왕은 10리 밖을 나가지 않는다』는 관례가 있어 왕과 왕비가 왕국 밖을 나간 다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근년에 와서는 시대의 추이로 다소 사정이 달라졌다 하더라도 여자만은 여전히 성묘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어서 당시 대비마마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마 서울시민 중에서도 및 사람 안될 줄 압니다.
그런 분께서 전화의 서울을 벗어나 피난민 틈에 끼어서 남쪽으로 가셨으니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마음 아픈 일이었옵니다.
파죽지세로 북괴군은 각처에서 압승하고 한때는 한국의 8할을 점령하여 정부는 남쪽 끝 부산까지 피난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서울에 침입한 공산군이 창덕궁에 들어가서 가장 집 물을 다 약탈하고 윤 황후를 몰아내자 운현궁의 흥친왕(고 이희공) 비는『그것이 될 말이냐』고 운현궁의 자기가 쓰던 방까지 내어놓았으며 1·4후퇴 때에는 미군부대의 원조를 얻어서 대비마마를 무사히 구포로 피난을 하시게 하여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 바깥어른과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던 것입니다.
흥친왕비는 고종황제의 형수로 바깥어른에게는 큰어머님이 되는 분인데 자기 한 몸도 가누기가 어려운 그때에 고령의 노부인이 앞장서서 대비마마를 잘 보호해 드렸다는 것은 좀처럼 하기 어려운 일로서 바깥어른도 항상 그 점을 고맙게 생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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