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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분단 사 반세기... 그 현장을 따라|남에의 갈망(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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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945년 10월부터 북한의 곳곳마다 공산당의 입당공작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에 실패하자 신민당이란 꼭두각시 정당을 만들어 「인텔리」등을 포섭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신민당에 입당했고, 38선 바로 북쪽마을인 강원도 인제군 남면 관대리의 심봉진씨도 신민당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 봄부터 공산당은 계획했던 대로 신민당과 합작공작을 벌였다.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진 그해 6월 8일 밤 심씨는 집 앞의 소련군본부를 살짝 피해 소양강변으로 빠져나갔다. 38선은 마을 앞 소양강을 경계로 그어져 있었다. 심씨가 밀밭을 정신없이 기고 있을 때 소군의 총소리가 등뒤에서 콩 볶아대듯 했다. 풍덩 강물에 뛰어들어 헤엄쳐 나갔다. 남으로…. 심씨가 탈출에 성공한 직후인 7월 29일 공산·신민 합당이 이루어졌고, 북한 탈출자들은 날로 늘어났다. 관대리 동쪽 소양강 기슭에는 탈출자들을 상대로 한 비밀 주막집이 있었다. 심씨 등은 밤마다 소양강을 건너 주막으로 가 강의 지세를 몰라 고심하는 탈출인들의 길잡이가 돼 목숨을 걸고 도왔다. 주로 함북·함남·강원도 북부의 사람들이 하루에 수백명씩 남으로 넘어왔다. 때로는 소군과 38보안대의 총격에 맞아 탈출자들이 강물을 붉게 물들이며 숨진 일도 많았다. <심봉진씨 (54·인제군 남면 면장) 의 말>
한마을이 38선으로 두동강 난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추전리의 북쪽에 살았던 이종은씨는 날마다 회의가 열리는 데다 왜정 때 머슴이 공산당원으로 상전 노릇을 하는 것이 꼴 사나왔다. 1947년 9월 16일 어머니 소상을 맞아 손님 대접을 했다. 38보안대도 소군도 술을 얻어 마시고 흠뻑 취하게 한 다음 새벽을 틈타 가족이 모두 계곡을 건너 남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대로 빤히 남쪽 마을을 바라보며 감시가 두려워 이루지 못했던 길을 돌아가신 어머니가 이루어줬다고 이씨는 기뻐했다.
한때 이 마을의 열성당원이기도 했던 조을경씨(서울서 복덕방 경영)는 남쪽의 사촌을 남몰래 만나려고 계곡을 건넜다가 밀고돼, 흠뻑 고문을 당한 끝에 그 뒤 단신 월남했다. 추전리 노동당 위원장이었던 황모씨도 남쪽의 친척들을 돌봐주었다고 비난받고 탈출, 경찰에 투신했다가 6·25때 포천 전투에서 전사했다. <지유성씨(65) 송남윤씨(54)의 증언>
북한탈출은 실은 한국과 일본민족의 혼성비극이었다. 한국인은 공산당과 소군의 힁포에 못 견뎌 고향 땅과 가족마저 등지고 해방의 기분이 채 가시기전 목숨을 걸어야했던 「38따라지」의 「엘리지」를 낳았으나 일본인은 38선만 넘으면 현해탄너머 그들의 고향과 가족이 기다리는 기대가 있었다. 해방된 민족과 패전국민이 공동으로 겪어야했던 38선상의 비극 속엔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패러독스」가 가득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38선 돌파 순간의 기쁨은 두 민족이 모두 똑같았다.
길은 한줄기로 이어져 있었다. 앞에 무엇인지 횐 것이 옆으로 길게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그것은 1년이 넘도록 우리마을에 떠날 수 없었던 38선 표지(목책)였다. 『아, 38선이 보인다…. 』 두 사람은 발을 멈추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말을 할 수 없었다.
눈짓으로 곧장 가자고 말하고 희고 긴 선을 향해 돌진...이것이 38선 목책인가 하고 잘 보니 옆에 주둔소가 있고 수명의 소련병이 총을 갖고 나왔다. 우리는 깜짝 놀라 발을 멈추었다.
소련병들은 빠른 말로 자기네들끼리 얘기하다가 한 소병이 드르르‥· 「윈치」를 감아 올려 차단봉이 들어올려졌다. ...아! 이때의 감격…우리는 이 차단봉 밑을 통과했다.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 똑바로 얼른 가야한다... <「후지와라· 데이」여사의 『내가 넘은 38선』에서>
『한탄강을 저 앞에 내다보며 나는 수많은 월남대열에 섞여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로스케」가 따라와요. 총을 메구…』 뒤에서 고함치는 소리에 우리는 입은 채로 물에 뛰어 들었다. 음력 삼월 초순, 아직 물속은 얼음같이 저렸다. 물을 건넌 후 내리 십리 길을 산 속을 헤매고 밭 두렁과 오솔길을 걸어 동두천에 다다랐을때는 물속에 젖었던 옷이 오한과 더불어 체온으로 반이나 말라가고 있었다. 물속에서 날카로운 돌에 베어진 내 다리와 발뒤꿈치에서는 선혈이 흐른 자국이 새빨간 줄을 긋고 있었다. 『후유! 이것이 이남 하늘이라니…. 』 <임옥인씨의 『월남 전후』에서>
해로로는 해주에서 용담포·옹진을 거쳐 강화·인천·서울 마포로, 진남포에서 강화·인천주변 해안의 서해길과 원산·성진·고성에서 주문진·묵호·강릉·부산의 남하 「루트」가 있었고, 육로론 경의선의 38선 남단인 금교에서 토성이나 개성, 학현에서 청단·경원선인 전곡·연천·대광리, 철원 등지에서 포천·동두천, 화천에서 모진교를 건너 춘천, 양구에서 추전리를 통해 춘천·원산·고성·인제에서 관대리를 거쳐 홍천으로, 동해북부선 북단 양양에서 주문진·복계, 금화에서 춘천으로 오는 길.
이들 「루트」 마다 길 안내자와 짐꾼들이 북한까지 빈번히 드나들며 탈출자들을 무사히 이남으로 건네주었다. <권기호 경정· 김광영 경사· 정호섭 경사·이종구 순경 등의 증언>
이제 이들 남하 「루트」가 됐던 길목마다 그날의 피와 고뇌가 아로새겨지듯 곳곳에 「삼팔다리」가 놓여졌으나 그 위를 지나는 차량이나 사람들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공동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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