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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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 황족들의 신적 강하로 소위 「왕공가 규범」에서 벗어나 「이은」「이방자」의 제3국인이 된 영친왕부처는 재일 한국인으로서 구역소 (구청)에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일본천황이 「인간선언」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친왕도 한국사람으로 되돌아와 일개시민으로 새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이었다. 등록을 마치고난 영친왕은 몸과 마음이 다같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이로써 일본과의 관계가 아주 단절된 것을 생각하면 다소 서운한 느낌도 없지 않았으나 위장된 황족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다시 찾은 것은 비할 데 없는 기쁨이었다.
그리하여 영친왕은 비록 경제적 여유는 없었을망정 아내와 아들과 함께 어디고 마음대로 다닐 수가 있고 때로는 별장이 있는 「나스」(나수) 에서 세 식구가 「골프」를 즐길 수 있는 것을 다시없는 행복으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영친왕은 병환이 나기 이전에도 도무지 말이 없는 분이므로 당시의 심경을 방자 부인은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일반 사람들 틈에 끼어 살게된 처음에는 아직도 왕족생활의 타성도 남았고, 또 정직하게 말해서 경제상의 불안도 커서 좀체로 안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만 한편 생각해보면 미지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듯한 새로운 기대에도 불타 있었읍니다.
이제부터 부모자식의 세 식구가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며 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기쁨은 그때까지 너무나도 속박된 속에서만 살아온 만큼 반동적으로 큰 것 같았읍니다.
『황족이란 모두가 규격품 같은 것이군요. 똑같은 틀에 넣어 동일한 규격으로 만들어 냈으니 말예요.』 이렇게 집 어른과 곧잘 얘기도 했습니다 만 정말 일반사회에 내려와서는 촛점이 잘 맞지 않는 것뿐입니다. 『하루 빨리 규격품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승리자인데 뭐니뭐니해도 이미 우리들은 늙었어. 젊은 사람에게만 이제부터 실력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니까 구야, 용기를 내다오.』 육군 중장, 군사 참의관으로 종전을 맞이한 집 어른에게 있어서는 새 출발을 해야만 될 이 판국에 젊은 사람만큼 용기를 갖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 대신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아들 구에게 큰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었는데 물론 우리들도 심기일신, 하루라도 속히 황족의 껍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에 익숙해보려고 노력했읍니다.
돌이켜 보건대 지금까지 너무나도 속세를 떠난 생활 속에만 들어박혀 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폐하」는 지금도 동경의 「긴자」(은좌)를 거닐어보신 일이 없습니다 만 우리들도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정말 「긴자」를 산보하는 맛도 모르고서 50년 가까이 살아온 것입니다.
츌생지는 궁성에서 가까운 「한죠오몽」(반장문) 근처이며 오랫동안 집어른과 살아온 「기오이쪼」(기미정정)도 그 근처고해서 자동차로 가면 불과 3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인데도 「긴자」라고 하면 「디파트」(백화점) 정도밖에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도 무슨 주최의 대림(대림) 이란 명목이 많았고 경관 호위아래 자동차로 쭉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어서 가끔 「긴자」를 거닐어 보고싶은 생각이 들어도 경비관들의 수고와 일반사람들의 폐가 염려되어 그만 단념하기가 일쑤였던 것입니다. 물건을 사러 나가더라도 자기가 돈지갑을 갖고 나가는 일은 없고, 다만 어린애처럼 이것저것 손가락질을 하면 대금을 시종이 지불하거나 월말에 궁가로 받으러 옵니다.
집 어른이 군에서 월급을 받는 것도 부관이 받아다 사무소에 납부할 뿐입니다.
즉 「미야께」(궁가) 라는 특수한 기관 때문에 아무리 자기재산이라도 조금도 자유로이 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돈에 관해서는 이런 이야기도 있었읍니다. 어떤 「미야께」의 마님이 결혼하여 신적으로 강하될 때 시녀로부터 처음으로 지전 뭉치를 받았을 때의 기분을 『기쁘다기보다 웬지 두려운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한 일이 있읍니다.
이것은 극단의 예인지는 모릅니다만 「헤이안죠」(평안조)의 궁중인들과 같은 우리들하고 생존경쟁이 격심한 속에서 자라난 사람들하고 「템포」가 잘 맞지 않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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