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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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영친왕 비의 수기는 계속된다. <암만 조카라 하더라도 남의 개인생활, 더구나 부부간의 일은 잘 알려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건 공 부처가 어찌하여 갑자기 이혼을 하게되어 세상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는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데 건공이 어디다가 쓴 그의 「수기」라는 것에
-생각하면 긴 괴로움의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내 「요시꼬」(가자)는 원래부터 가정이나 가사에 관심이 없었다. 가정 때문에, 생계 때문에 비롯된 심정이라고 하더라도 그 전후파적 개인의 자유와 남녀 동등권적 사상이 바탕이 된 분방한 상업활동은 인생의 기반인 가정을 나에게서 그리고 세 아들에게서 완전히 박탈해가고야 말았다.
뿐만 아니라 영업상 불가피한 일이라 하여 -나의 재삼의 충고에도 불구하고-그때까지 계속하고 있던 교양 없는 잡동사니 부랑배들과의 교제는 필연적으로 상궤를 벗어나는 결과가 되어 우리 부처의 사이를 구원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밀어내고 말았다-·고 한 것을 보면 대개 그 내용이 짐작이 가기도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청천의 벽력이라고도 할까 나의 아버님 「나시모도노미야·모리마사오」 (이본궁수정왕)가 전쟁범죄의 용의자로서 연합국 최고사령부로부터 「스가모」(소압) 구치소로 들어가라는 지령을 받아 정말로 숨이 막힐 듯한 심정이었읍니다.
아버님 수정왕은 원수로서 군의 장로이긴 합니다만 태평양전쟁이 시작될 때나 혹은 전쟁중에도 소위 「전쟁 범죄자」에 해당되는 것은 하나도 한 일이 없었으며 오직 「고오다이·징구」(황대신궁)의 재주와 대일본무덕회 총재라는 황족으로서의 명목상 지위에 있었다는 것뿐입니다.
대일본 무덕회라는 것은 검도의 진흥단체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것을 GHQ (연합국 최고 사령부)의 통역이 문자그대로 「밀리터리·버츄·어소시에이션」(Military Virtue Association) 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GHQ는 이것을 초 군국주의자의 단체로 오인하고 그 총재인 아버님을 그의 두목으로 간주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우익적 단체였던 무슨 「구미」(조)라는 것과 집을 짓는 토건회사인 「시미즈 구미」(청수조), 「오오꾸라 구미」(대창조) 등까지도 다같은 「구미」라고해서 함께 소환장이 나왔다는 웃음거리조차 있었던 시절이니까 무리도 아닌 줄 압니다. 아버님께 곧 달려가서 문안을 드리니까, 아버님은 『나는 조금도 양심에 가책을 받은 일은 없으나 다만 폐하 대신으로 「스가모」로 가는 줄 알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말씀하실뿐이었읍니다.
황족의 몸으로 내일은 붙잡힐 몸-그것도 「명치」라는 좋은 시절에 태어나 제국의 영광과 더불어 살아온 몸이 다 늙으막에 망하는 이 치욕이니 만큼 아버님의 분하고 억울함도 여간 큰 것이 아니었을 줄 압니다.
그해 12월 12일 아침 새벽의 횐 서릿발을 밟으며 보따리 한개만을 손에 들고 MP에게 끌려가는 일흔 두살의 늙은 아버님을 전송했을 때는 정말 말도 나오지 않았고 다만 패전의 쓰라림과 냉혹한 것만을 뼈아프게 느꼈을 뿐입니다.
아버님은 구치감에 들어가신 후에도 이 추위에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교수형이나 혹 받지 않으실까?…·등등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불길한 생각만이 머리에 떠올라 견디기가 어려웠는데 그렇다고 물론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고 의복 등의 차입도 받아주지를 않았읍니다.
다만 때때로 외무성의 「나까무라」(중촌) 공사가 어머님께 찾아와 아버님이 『이런 나이가 되어 처음으로 손등이 터졌다』라고 술회하시더라는 말씀을 전해듣고 옥중의 냉엄한 생활이 짐작되어 오직 눈물만 흘릴뿐이었읍니다.
다행히도 아버님은 다음해 4월에 용의가 풀려 갑자기 아무 사전연락도 없이 「지프」로 석방되어 오셨을 때는 가족일동이 깜짝 놀라고 또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그로부터 육체상으로나 정신상으로나 큰 타격을 받으시고 갑자기 몸이 쇠약해 지셔서 그후 3년만에 돌아가셨읍니다. 그런 일만 없었다면 좀더 사셨을 것을 전범으로 「스가모」로 가셨던 충격이 수명을 단축시킨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겠지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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