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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해법, 세종대왕에게 물으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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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독도 입도는 쉽지 않았다. 거의 한나절을 기다린 뒤에야 풍랑이 조금 잦아졌다. 곡예하듯이 쪽배를 정박시키고 아슬아슬하게 독도에 내려섰다. 1997년 여름 나는 그렇게 독도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런데 독도에서 엉뚱하게도 나는 영화 빠삐용의 절해고도 기니아섬을 떠올렸다. 그리고 야자열매 구명대에 매달려 그 섬을 떠나는 스티브 매퀸을 생각했다.

시마네현의 '독도의 날' 제정 이후 초등학생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독도 문제'에 마음을 쏟고 있다. 하지만 입도를 쉬 허용하지 않는 독도처럼 '북핵' '한류' 등과 중첩된 한.일 외교는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과연 이 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는 구명대는 없는 것인가.

세종시대의 일본인도 끈질기다 못해 지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사코 대장경(大藏經)을 내놓으라고 했다. 일본국의 태후(太后)가 새로 지은 절에 보관할 원판 대장경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었다. 세종도 처음엔 '교린(交隣)의 정의가 지극한' 일본을 위해 내주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유일본' 대장경을 내줘서는 안 된다는 신하들의 만류로 생각을 바꿨다. 그러자 일본 사신들의 생떼가 시작되었다. '길에서 서로 마주볼 정도로' 잇따라 찾아온 사신들 중에는 "7000권의 원판 대장경을 주지 않으면 차라리 여기서 굶어 죽겠다"며 단식 농성에 들어간 자도 있었다. 심지어 "병선(兵船) 수천 척을 보내어 약탈하겠다"면서 위협하기도 했다.

세종은 마치 철부지 대하듯 이들을 달래고 가르치면서 대장경 대신 밀교대장경판과 화엄경판을 주었다. 회례사(回禮使)도 보내기로 약속했다. '빈손'으로 돌아가면 처벌받을지도 모를 일본 사신들에 대한 배려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회례사가 일본에 갔을 때 터졌다. 일본은 1424년 회례사로 간 박안신(朴安臣) 일행을 55일간이나 구류시켜 놓은 채 "무장한 배 100여 척을 조선으로 보내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예물 중에서도 불경만 빼고 나머지는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

이에 상호군 박안신은 "지금 불경만 받겠다는 것은 곧 절교하자는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도(天道)는 정성으로써 만물을 이루게 하고, 인도(人道)는 신의로써 여러 가지 행실을 서게 한다. 그러므로 나라를 경영하는 자는 반드시 이웃 나라와 교제할 때 정성을 다하고 서로 속이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귀국이 우리를 이렇게 대접하고, 명일에 우리나라가 귀국의 신하를 또 그렇게 대접한다면 양국의 관계가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자 그동안 피하기만 하던 일본 쪽에서 비로소 답서를 보내왔다. "이제 귀하의 편지를 보니 말이 대단히 적절하다. 우리 전하는 처음에 굳게 거절하였으나, 귀국의 사신들에게 혹 누를 끼칠까 염려하여 가지고 온 예물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하셨다." 일본 국왕은 또한 돈 100관(貫)을 내려주기도 했다. 자칫 심각한 외교분쟁까지 치달을 뻔했던 '대장경 위기'는 이렇게 해결되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 대한 반응이 국내외적으로 다양하다. 나는 그 글이 한국 외교에서 그동안 경시돼온 '말의 정치'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정치가의 말은 회례사 박안신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국격(國格)의 수준이자 외교의 궁극 목적인 국가이익을 성취시키는 핵심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말의 순서'다. 그 글이 만약 주일대사의 글이었다면 어땠을까? 대통령은 세종대왕처럼 맨 뒤에 서서 '교린의 정의'를 돈독히 하는 데 힘쓰고, 외교관들이 '할 말은 하고' 때론 임기응변 조치도 취해가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어떨까? 마지막 카드는 최후까지 아껴두는 것이 '말'과 '일'을 풀어가는 데 좋지 않을까?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