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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의 마음 엿보기] 예술과 권력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38호 18면

바퀴벌레로 만든 양갱을 먹는 ‘설국열차’의 장면은 러시아 거장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에서 썩은 고기 배식을 받는 수병들의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설국열차의 도끼 싸움 장면도 오데사 계단의 폭동을 연상시키고, 열차의 좁은 칸에서 나사를 돌리고 있는 아이는 ‘모던 타임스’의 톱니바퀴에 매달린 찰리 채플린과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유모차를 탄 아이의 몽타주다.

 ‘더 테러 라이브’의 기회주의적 언론인상은 러시아 문호 막심 고리키의 희곡 ‘낮은 곳에서’와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의 ‘조용한 미국인’에 등장하는 무기력한 지식인과도 비슷해 보인다.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한 체제에 대한 분노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메시지가 서로 유사하기 때문일까. 매카시즘적 관점으로 보자면 ‘전함 포템킨’이나 ‘모던 타임스’, 막심 고리키의 작품들은 모두 공산주의 선전물이었다. ‘엉클 톰스 캐빈’이나 ‘앵무새 죽이기’도 인종차별주의자 눈에는 불온물이고, 게르만 우월주의의 증거로 차용되었던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도 시온주의자들 눈에는 반(反)유대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진 나쁜 작품이다.

 그렇다면 순수한 예술적 태도만 견지한다고 과연 예술이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일러스트 강일구

 순수성을 지향한다던 많은 예술가가 대거 친일 행적에 가담했고, 평등과 정의의 이상을 좇았던 카프(KAPF)파 작가들이 월북해 정권에 이용만 당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처세 능하고 셈 빠른 정치인들을 맘결 곱고 세상 물정 모르는 예술가들이 당하겠는가.

 그러나 만약 ‘오적’을 쓴 김지하, ‘껍데기는 가라’던 신동엽, 내란 기도와 계엄법 위반으로 투옥되었던 고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쓴 조세희 같은 이들이 없었다면 현재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권력은 원래 주변의 감시와 제어가 없으면 그 욕망을 알아서 조절하지 못한다. 예술가들이 선동이란 오명을 감수하면서도 정의롭지 못한 일에 목소리를 내는 까닭이다. 원래 대중은 아무리 정의롭지 못한 일을 겪어도 먹고살기 바빠 쉽게 잊어버리기 마련이라, 예술로 형상화되어 지속적인 담론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구체적인 변화가 올 가능성이 희박하다. 어두운 시대에 많은 예술가가 투옥과 추방을 겪는 이유다. 예술이 역사보다 더 중요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태도와, 예술가들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투사되는 모상(Image)만 건드리기에 진리를 비껴갈 위험성에 빠질 수 있으니 순정한 이데아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플라톤적 태도는 긴장과 대립의 관계다. 하지만 그 두 입장이 모두 필요하다.

 융 심리학은 자신보다 약한 쪽을 지배하고 조종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 콤플렉스에 빠지면 사람과 사람, 외부와 내부, 여성과 남성, 이성과 감성을 연결시켜 주는 에로스적 에너지가 고갈된다고 설명한다. 권력이 멋대로 만든 비극적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창조성이 사라진 사회에 남는 것은 권력이 휘둘러 만든 메마른 핏자국뿐이다. 유대인이라는 죄로 억울하게 투옥당한 드레퓌스 사건에 입을 닫고 정권에 영합하는 주류와 싸워야 했던 에밀 졸라 같은 예술가가 등장해야 하는 공작정치의 사회는 아니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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