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당한 만큼 갚아주겠어 ! 일본인 맞나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일본 방송계에 모처럼 대형 히트작이 탄생했다. TBS가 매주 일요일 밤 9시에 방송 중인 ‘한자와 나오키(半澤直樹)’라는 드라마다. 지난 7월 7일 첫 회 시청률 19.4%로 시작한 이 드라마는 지난 25일 6회 방송에서 평균 시청률 29%까지 올라섰다. 2년 전, 최고 시청률 40%를 기록했던 ‘가정부 미타’의 인기를 넘어설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한자와 나오키’는 주인공 이름이다. 1990년대 초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할 무렵 대형은행에 입사한 주인공이 은행 내의 부조리한 업무행태와 파벌다툼, 권모술수에 맞서는 과정을 그렸다. 실제 은행원 출신인 작가 이케이도 준의 소설이 원작으로, 불경기 속 실적 전쟁에 시달리는 은행원들의 현실이 실감나게 담겼다. 무엇보다 주인공 한자와 역을 맡은 배우 사카이 마사토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연기가 최고다. 그가 “부하의 공은 상사의 것, 상사의 실패는 부하의 것”이란 말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부도덕한 상사들에게 날리는 경고는 유행어로 떠올랐다. “당하면 당한 만큼 갚아주겠어!” “배로 갚아주겠어!” “열 배로 갚아주겠어!”

일본 TBS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

 2011년 대지진 이후 방영된 ‘가정부 미타’는 당시 일본인들의 복잡한 심리를 잘 읽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뭔가 어둡고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군소리 없이 골치 아픈 문제를 척척 해결해주는 이상한 가정부의 활약에 사람들이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한자와 나오키’ 역시 지금 일본 사회가 바라는 강한 영웅상을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온다. 선의를 가진 인간에겐 예의 바르게 대하지만, 부당한 괴롭힘에는 절대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철퇴를 내린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무작정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악인에게 맞서기 위해 각종 편법을 동원하고, 그들의 약점을 자신의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원작자도 말했다. “이것은 권선징악의 드라마가 아닌, ‘칼싸움’ 같은 이야기일 뿐”이라고.

 아사히신문의 논평이 재밌다. 드라마 속 명대사인 ‘배로 되갚음(倍返し·바이카에시)’은 80년대 연인들끼리 나누던 농담이었다고 한다. “밸런타인데이에 선물을 받으면 화이트데이에 배로 갚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은, 여유 넘치던 이 대사가 정반대의 무시무시한 의미로 쓰이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한때 ‘배려’와 ‘참을성’으로 상징되던 일본인들은 어디로 간 걸까. ‘한자와 나오키’의 절규를 볼 때마다 최근 조급하고 무자비해진 일본 사회의 어떤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영 편치만은 않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