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58)프놈펜 초연의 뒤안을 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글·사진 프놈펜에서 이방훈 특파원]「프놈펜」 공항에서 C·46 미군수송기 2대와 「캄보디아」 공군의 구식 전투기 10대를 보았을 때는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의 어마어마한 전쟁장비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나마 전쟁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데 막상 「프놈펜」 시내에 들어서고 보니 긴장의 도가 탁 풀리고 말았다. 관공서 건물마다 무장군인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비를 하고 있고 거리에서도 군인들을 심심치않게 목격할 수 있었으나 삼엄하다는 느낌을 들지 않았다.

<살기 없는 시민들의 표정>
총을 메고 있는 군인의 복장이나 행동표정이 어딘가 한구석이 비어있는 것 같은 부족감을 직감했다. 눈동자에 살기는 고사하고 인자한 빛이 감돌아 친근감마저 들었다. 「캄보디아」사람들의 선천적인 순박성인지도 모른다. 군인들뿐만 아니라 「호텔」 식당 상점 등 일반인이나·관리·경관 할 것 없이 말이 적고 모두 친절했다. 거리도 깨끗하고. 인구 60만이라고 하지만 사람이나 차가 붐비지를 않는다. 조용한 단계를 지나 한적감마저 들었다. 외신이 전하는 공산군의 「프놈펜」 포위망 압축 위기를 이곳 수도에서는, 느낄 수가 없었다. 저녁 6시부터 통금이 시작된다. 그러나 6시 후 「시클로」(삼륜 자전차)는 여전히 손님을 실어 나르고 사람들의 통행도 자유스럽다. 식당 술집 상점도 문을 열고있는 집이 많다. 다만 가두검문 검색이 좀 심하다는 것뿐이다. 「카바레」는, 밤 12시까지 성업. 군인, 민간인 할 것 없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교외로 나가는 길목에는 군데군데 경비 군인들이 자키고 서서 통행을 엄중히 차단하고 있었다.

<「가네포」 경기장은 훈련소로>
「비라」·「포스터」·「플래카드」 등도 이따금 눈에 뛸 뿐 상상했던 것 같이 많지는 않았다. 혁명초기의 노도 폭풍의 계절이 지나가 안정단계에 돌입한 탓인지도 모른다. 우리 나라와는 국교단절이란 최악의 사태로 발전했던 금귀하 사건이 일어난 「가네포」 경기대회장 「올림픽·스타디움」은 신병 훈련장으로 변했다. 여군들이 훈련하고 있었는데 총들이 없다. 「침손」 중위는 『무기가 부족하여 여군들에게 줄 총은 없다. 그래서 공수로 집총 훈련을 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남자 신병들도 이곳에서 사흘간 소총 쏘는 방법만 익혀서 전선으로 나간다는 것. 민간 「버스」 10여대가 「스타디움」밖에 줄지어 있었다. 군인 수송 편도 「트럭」이 없어 전부 민간차량을 징발 사용한다고 했다.
「프놈펜」 시내에서의 유일한 전쟁 기분은 매일 저녁 5시쯤이면 거리를 지나가는 민간 「버스」들의 이동행렬이다. 바로 이 「스타디움」에서 수련을 마친 신병들은 이 「버스」에 타고 어딘가 전선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들 출정 군인들은 「버스」 꼭대기에까지 매달리다시피 꽉 메워 노래를 부르고 깃발을 흔들면서 거리를 지나간다. 그러나 손을 흔들며 흐느끼는 이별의 장면도 없다. 거리의 시민들은 무표정하게 이 「버스」 행렬을 바라보고 있다.

<위세 당당한 진주 월남군>
미국 NBC·TV 취재반에 끼여있는 한국 「카메라」 맨 한사람은 「우돈」 전투체험담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캄보디아」 군은 장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실효성 있는 전투를 한다. 왜냐하면 탄약이 부족하기 때문에 총을 함부로 쏘지 않고 적을 최근 유효사거리까지 유인한 다음 발사 명령을 내려 많은 효과를 거둔다는 것. 그러나 훈련과 경험이 부족한 사병을 거느리는 지휘관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소리지르는 친구, 도망가는 친구,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는 친구들을 협박, 공갈 또는 타일러 싸우자니 배 이상 힘들 것이라고 동정했다. 그러나 옆에서 싸우는 월남군이 한 트럭의 탄약을 눈을 감고 쏘고는 겨우 1백m 전진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캄보디아 군의 우직한 용감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프놈펜」 시내에서의 월남군의 위세는 대단했다. 월남 해군함이 3척이 월남기를 게양하고 「톤레삽」에 정박, 그 부두 일대는 출입 금지, 주 「캄보디아」 월남 대사관의 어마어마한 월남군인 경비와 「로열·호텔」 옥상에 장치된 「사이공」 직통 무전 시설, 한 월남군 고급 장교는『무전 연락으로 10분내 「헬리콥터」 수대가 「프놈펜」에 동원된다』고 자랑했다. 「프놈펜」 외곽에 약 5천명의 월남 군인들이 주둔하여 수도 경비에 임하고 있다고도 했다.

<암시장선 한국 군복도 판매>
그리나 한 「캄보디아」 장교는『처음에는 월남군이 「프놈펜」 시내에도 많이 들어와 있었으나 불미스러운 일이 많아 「캄보디아」 정부요청으로 외곽에 풀려나갔다』고 귓속말로 속삭였다.
미·월 군 「캄보디아」 월경 작전 후 월남군의 「캄보디아」 영내에서의 행패는 공공연한 비밀로 이곳 수도시민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주월 미군 고위층과 월남군 고위층도 이러한 월남군 행패 근절에 무척 부심 했다는 소식. 하나의 예로 「프놈펜」이 암시장에는 군수품은 물론 심지어 무기까지 매매되고있는데 거의가 월남 군인들로부터 흘러나온다고 한다. 한가지 놀란 사실은 육군이라고 찍힌 한국 군복도 팔고있었다. 미 군복보다 한국 군복이 「캄보디아」 군인에 잘 맞아 비싸게 팔린다는 것. 물가 상승·군수품 암거래, 「캄보디아」도 전쟁부작용이 하나둘 싹트고 있다 하겠다.

<자위의 결의 역력히 보여>
반면 월남 피난민 수용소는 비참했다. 월남 해군 함정이 위풍 당당히 정박하고 있는 부둣가 맞은편 학교와 절간에 수용된 「캄보디아」 안 월남인들은 월남으로의 후송을 기다리면서 안전도모를 위해 집단수용 돼 있었는데 위생상태·생활상이 거지나 다름없었다. 벌거벗다 시피 한 어린이와 어른들이 수용소 안판에서 서성대며 밥을 끓여먹는 모습은 동정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월남정부는 전원 후송에서 방침을 변경, 도로 캄보디아에서 예전대로 영주시키려는 교섭을 캄보디아 정부와 진행 중이라고 알려졌다.
「시아누크」 궐석 재판과 친정부 학생 「데모」, 개각, 「론·놀」 정권도 국민결속에 안간힘을 쓰고있었다.『우리에게 무기를 달라』『원조를 달라. 그러면 우리는 자립한다』고 「캄보디아」 정부고관들은 입을 모아 호소했다. 한 가지 마음 든든한 것은 이들이 공산군의 침략에는 죽음으로 조국을 방위 하겠다는 굳은 결의가 엿보인 사실이었다. 중립은 지킨다. 그러나 과거의 좌경에서 우경으로 태도를 변경한 징조가 여러 면에서 뚜렷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