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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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왕실에 지극히 충성된 충정공 민영환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얼마 아니 되어서 한가지 전무후무한 기적이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선생이 자결하신 피묻은 옷에서 「혈죽」이 생겨난 사실이다. 선생께서 순국하신 후 그 이듬해 8월에 선생의 큰아들 범식이가 우연히 사랑방에 나가서 놀다가 사랑골방 마루 널판을 뚫고 나온 대(죽) 나무를 발견하였다.
집안 사람이 놀라서 나가보니 선생께서 자결 할 때 입고있던 피묻은 옷을 뚤뚤 뭉쳐서 선생이 거처하던 골방에 넣어두었던 바 바로 그 마루 밑에서 푸른 대나무가 자라나 골방 마루를 뚫고 나왔다. 마디는 아홉이고 길이는 석자 가량이나 되었는데 그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성성하게 살아 있었다. 사람들은 선생께서 흘리신 피가 마루 밑으로 떨어져서 거기서 대나무가 난 것이라고 말하였다.
옛날부터 충신이 죽은 뒤에는 대나무가 난다고 하여 그것을 「혈죽」이라고 불렀다. 전동(지금의 안국동)에 있는 선생의 저택에는 날마다 혈죽을 보러오는 사람이 답지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선생의 충군 애국에 더욱 감격을 새롭게 하였었다.
참으로 현대 과학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일대기적이었다. 그 근처에 대나무도 없었고, 더욱이 서울에서는 대나무가 성장하는 법이 없었었다. 그러나 대나무가 난 것만은 사실이니 필연코 선생의 애국 정신이 그와 같은 기적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때 서정태 라는 선비는 다음과 같은 혈죽 시를 제문으로 바치었다.
임은 대를 의지하고
대는 임을 의지하여
임 가시고 대 났으니
곧 임이로다.
오백년 돌아오면
사람도 다시 나니
정공 가신 뒤에
또한 민 공이 나시도다.
그 같이 「한일보호조약」은 한국에 대하여 크나큰 파란과 희생을 낳게 하고 급기야는 나라를 망치게 하였거니와, 당시의 미국 대통령 「디어도·루스벨트」는 그런 것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일로 강화 조약을 체결할 때에 한국을 일본의 보호하에 둘 것을 명백하게 확인하여 주었으므로 일본은 마음놓고 아무 거리낌도 없이 한국에 대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는 노일 두 나라는 있으나 한국과 같은 약소 국가는 거의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젊었을 때의 이승만 박사가 민충정공의 뜻을 받들어 「보호조약」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인천에서 이민선을 타고 포트머드로 쫓아간 것은 그 때의 일인데, 이 박사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포트머드에 도착한 나는 우선 조그마한 호텔에 자리를 잡고 즉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면회를 요청하는 편지를 내었다. 그때 포트머드에는 미국 대통령을 위시하여 러시아 대사 위테 백작과 일본 대표 고무라 (소촌수태낭) 외상 등이 도착하여 작은 도시가 와글와글 하였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회답이 없으므로 매우 초조하게 지내던 중에 하루는 대통령으로부터 아무 날 몇 시에 오면 만나겠다는 편지가 왔다.
지정한 날짜에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서 한국의 사정을 진정하고 무슨 일이 있든지 한국의 독립이 침해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주기를 간청하였더니, 나의 말을 다 듣고 난 그는 『그대의 의견은 잘 알았으나 일개 민간인에 지나지 않는 그대의 말만 가지고는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워싱턴에 있는 한국 공사의 이름으로 정식 공문을 내면 「강화 회의」때에 그것을 참고로 삼겠노라』고 하였다.
당시 워싱턴 한국 공사관에는 공사는 없었고 김윤정이라는 사람이 일등 서기관으로 있었는데, 나의 말을 듣고 난 그는 자기는 서기관에 지나지 않아 그 자격이 없으니 이 기회에 아주 공사로 승격시켜주면 공문을 내겠노라고 하므로, 즉시 민충정공 에게 연락해서 그를 주미 대리 공사로 임명하였는데, 결국 감투만 얻어 쓰고 공문은 내지를 않았으니, 그것은 장차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뒤의 일을 겁먹은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는 외국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한다는 말과 같이, 해방 직전 얄타 비밀 협정에서도 미국 대통령은 또 다시 크나큰 실수를 하였으니, 다만 다른 것은 「디어드·루스벨트」대신에 「프랭클린·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었고, 「보호 조약」대신에 38선이 마련된 것뿐이다.
그리고 「프랭클린·루스벨트」도 다 같은 「디어드·루스벨트」의 일가라고 하니 그것도 또한 이상한 인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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