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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여수상들-인도의 인디라·간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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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인도의 5억 인구를 5년째 다스리고 있는 인디라·간디수상(54)은 『세살때부터 공직에 몸을 담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1대 자와하를랄·네루, 2대 랄·바하두르·샤스트리수상에 이어 3대 수상에 취임한 간디여사는 인도 국민들이 영국의 식민통치로 시달려 반영독립운동이 열도를 더해가던 1917년 인도의 북부 알라바하드주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변호사였던 할아버지대부터 혁명가의 집안이 된 네루가에서 자와하를랄·네루씨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인디라·프리야다르시니·네루양을 아버지는 인두(달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그러나 꼬마 인두양은 할아버지와 부모가 모두 독립운동의 대열에서 마치 이웃 나들이처럼 감옥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외로운 달』이 돼야만 했다. 그래서 세살때부터 인두양의 공직생활은 시작이 된다.
하인들밖에 없는 텅빈 집안에 인두양의 친구라곤 인형밖에 없었다. 조막손으로 인형을 갖고놀던 세살된 인두양은 인형을 한 줄로 세워놓고 『나가라, 영국 순경을 때려라』고 호령했으나 마음이 후련하지가 않았다.
12세땐 이웃 어린애들을 모아 꼬마 의용대 비슷한 원숭이 여단을 만들었다. 원숭이들은 시가지 쇼·윈도에 걸려있는 옷가지가 외제인 듯 싶으면 돌멩이를 던지고 내빼는가하면 영국군 보초에 전달되는 메시지를 훔쳐내고 애국자들 사이를 오가며 첩보활동을 맡기도했다.
인두양의 솜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인들을 모아놓고 책상위에 서서 열변을 토하면서 왜 아버지와 인도 사람들이 영국 사람들에게 끌려가느냐고 울부짖었다.
그러다가 길가로 뛰어나가 영국 경찰이 인도 사람을 잡아가는 것을 보고 『나를 잡아가시오, 나를 때리시오』하고 대들기 일쑤였다. 2, 3년동안 스위스에 건너가 유학한 것을 빼놓고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이런 식으로 보낸 인두양은 19세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고 슬픔을 달래면서 옥스퍼드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역사학을 공부하고 5년만에 귀국한 인두양은 유학시절에 사귄 변호사 지망생인 페로제·간디씨(마하트마·간디와는 무관)와 결혼을 하게되었으나 사랑의 보금자리가 채 마련되기도 전에 반영지하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부부가 함께 13개월 동안이나 옥살이를 해야했다.
제2차 대전이 끝나고 47년 인도가 독립돼 아버지 네루가 수상대리로 앉자 두 아들의 어머니에 불과했던 인디라·간디여사의 생애에 큰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독신이 된 네루수상은 딸을 공식적인 호스티스로 불러 들였다. 간디여사는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곁으로 가버렸다. 말하자면 남편과는 별거가 시작된 것이다. 대역 퍼스트·레이디가 된 간디여사는 국내외 어디서나 아버지 네루수상의 곁을 지켰고 해외여행때면 네루수상은 꼭 딸을 데리고 다녔다. 그러므로 인도에서는 간디여사가 수상 다음으로 알려진 인물이 되었고 주은래나 불가닌 티토등 각국의 원수들이 네루수상을 만났을 땐 간디여사와 더 많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영광을 딸이 물려받을 날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59년에 국민의회의장자리에 앉게된 간디여사는 64년에 들어 수상이 더욱 병약해지자 사실상의 수상대리나 다름없이 되었고 그해 5월에 네루수상은 숨을 거뒀다. 간디여사는 비행기에서 아버지의 골분이 인도의 산하에 뿌려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간디여사는 정치와는 손을 때고 인류학이나 공부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이은 신임 샤스트리수상은 꼭 외상직을 맡아 달라고 간디여사에게 간청해왔다. 간디여사는 사양하다가 좀 가벼운 공보상직을 받아들였다.
샤스트리수상이 1년7개월만에 갑자기 세상을 뜨자 인도의 여당인 국민의회파는 네루노선을 고수한 샤스트리의 후계자로 간디여사에게 『장미보다 가시가 많은 왕관』을 씌워주기로 해 인도의회는 3백55대 1백66표로 보수파인 수상후보였던 장상 모라르지·데사이를 누르고 간디여사를 수상으로 선출했다.
『인도와 같은 가난한 나라에선 중도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산적한 인도의 짐을 걸머진 것이다. 간디수상은 14개 은행을 국유화하는등 사회주의정책을 따르고 있다. 그 결과 국민의회파의 친서방·보수적인 분파의 반발로 69년에는 당에서 제명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여수상은 건재하다.
60년에 별거중이던 남편과 사별한 후 어느 미남 외교관과 염문이 잦았고 한 야당지도자가 혼자 연모하다가 아직도 독신으로 지낼 정도로 아름다운 여수상은 『근래들어 앞으로 다시 직업을 갖는다면 산등성이에 고아원이나 탁아소를 설치하겠다』고 독백했다는 것이다. 수상에겐 25, 27세된 두 아들이 있다. <김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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