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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년 섭정 대원군 사저 운현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운현궁 한세월은 이조의 마지막 등불이 심지를 돋우고 광채를 힘차게 뿜어내던 시절-. 외세의 모진 바람에 그 등불이 꺼지자 이조는 망했고 겨레는 반만년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맛보았다.
운현궁은 그 마지막 등불 흥선대원군이 살던 집.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일인지하, 만인지상, 왕가와 서민, 정치가와 백성, 웃사람과 아랫사람의 지위를 한 몸에 골고루 겪었던 한 거인의 그림자는 잊혀지고 그가 살던 집은 육영사업에 혹은 예식장에 그 일부를 양보하면서 세태의 무상함을 되새기고 있다.
경술년 정월 열사흘날 쓸쓸했던 운현궁에 봄이 돌아왔다. 빌어먹는 개 한 마리 찾지 않던 흥선집에 팔도강산에서 수 없는 무리들이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게 된 봄이 온 것이다. 소설가 고 김동인은 그의 대표작 『운현궁의 봄』에서 철종을 이을 새 임금을 결정하는 중희당회의(조 대비주재)를 숨막히게 묘사했다. 『여러 원로 대신들의 의견은 다 들었소이다. 혹은 가하다 하고 혹은 부하다 해서 대신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못하나 의견을 물은 것은 단지 참고 하고자 물은 것일 뿐, 승통에 대해서는 내 이미 작정한 바이니 그리 아시오.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도령 명복을 익성군으로 봉해서 익종대왕의 대통을 잇도록….』
섭정을 맡은 대원군은 이후 10여년 간 운현궁에서 절대권력을 손에 쥐고 팔도강산 3백여 주를 호령, 양반계급의 전횡을 막기 위해 서원을 철폐했으며 왕가의 위엄을 드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재건하는 등 과단성 있는 정책을 폈다.
운현궁(현 종로구 운니동114)은 원래 흥선대원군의 사가. 이곳이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종이 왕으로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었기 때문. 고종 원년부터 운현궁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한편 운현이란 이름은 고개 이름으로서 이조 초기(단종 때)에 지금의 휘문 중·고등학교 자리에 관상대인 서운관이란 관아가 생긴데서 유래한다. 세조 12년1월 서운관이 관상감으로 개칭되면서 고개 이름은 서운관령 혹은 관상감점으로 혼용되었다.
이조 말엽 순조 때에는 운관현으로 약칭되다가 그 후 다시 관자가 더 탈락되어 운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운현궁은 대원군의 집이면서 또한 고종이 어릴 때 살던 집. 고종은 등극한 후에도 사친인 대원군을 뵙기 위해 자주 운현궁에 발길을 돌려 운현궁 길목에는 경근문과 공근문이 섰다. 고종은 운현궁에서 고종3년 민비와의 가례를 했고, 대원군과 부인 민씨가 운현궁에서 별세했을 때에는 운현궁에 설치된 예장청에 와 곡을 했다.
광무2년(1898) 운현궁의 화창했던 봄은 끝났다. 『무술년 이월 초이틀, 그날 운현궁 안의 공기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문득 안에서 곡성이 울려 나왔다. 그 곡성은 삽시간에 퍼져 온 궁내가 곡성으로 화했다. 운명하셨다는 말이 퍼지자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그들의 깨끗한 옷이 더럽힌다 하지 않고 땅에 꿇어앉았다.』 (운현궁의 봄에서)
대원군이 돌아간 다음 운현궁은 그의 사자 흥친왕 이재면에게 상속되고 다시 흥친왕의 아들 이준에게 물렸으나 후사가 없어 의친왕 이강의 둘째아들 이우씨에게 상속되었다. 이우씨는 2차대전 때 일본에서 사망, 그의 미망인 박찬주여사가 지키고 있으나 집주인은 박여사의 아들 이청씨. 대원군이래 집주인이 5번이나 바뀌었다.
운현궁의 일부는 현재 덕성여자대학으로 쓰이고 있으며 일부는 한때 운현궁 예식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연전 일본 대사관이 운현궁에 들어선다는 소식이 퍼져 시민들은 언짢은 마음을 금할 수 없었으나 다행히 일본 대사관으로 팔리지 않고 지금은 TV스튜디오가 들어섰다.
운현궁의 현 주인 이청씨는 지금 미국에서 구조 공학을 전공하고 귀국 채비를 하고 있다. 박 여사는 아들 이청씨의 귀국을 기다리며 새 설계에 부풀어 있다. <김영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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