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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방지 대책, 인권 침해 낳아선 곤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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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민경원
사회부문 기자

대학은 ‘배움의 전당’이다. 그런데 요즘은 ‘성범죄의 무대’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지난 3월 홍익대 미대 작업실에서 동기 여학생 성폭행 사건이 발생한 데 이어 6월과 7월 육군사관학교와 고려대에서도 성폭행 사건이 터졌다.

 이에 각 대학은 앞다퉈 성폭력 방지 대책들을 내놓고 있다. 대부분 2001년을 전후로 제정된 ‘성희롱·성폭력 방지 및 처리에 관한 규정’과 시행세칙이 모태다. 당시 이 규정을 근거로 성평등상담실·양성평등센터 등이 발족됐다. 최근 대책들은 이를 현 상황에 맞게 고친 것이다. 학칙 개정안의 처벌은 재교육프로그램 이수나 사회봉사 등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일부 학교가 가해 학생의 실명 공개 조항을 넣어 ‘과도한 인격 살인’ 논란을 빚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6월 개정된 한양대 규정 제20조는 “가해자의 실명을 포함한 사건 공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같은 해 11월 개정된 연세대 시행세칙 제13조에도 “가해자가 자신의 실명을 기재한 공개사과문을 작성, 공표하도록 조치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또 “가해자가 재심의 요청 없이 징계에 불복하는 경우 동의 없이도 가해자 신원을 포함한 사건 공개를 할 수 있다”는 문구도 있다.

 이 같은 학칙 개정안 내용이 뒤늦게 알려진 건 지난 5일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에 등장한 대자보 때문이었다.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것으로 알려진 한 학생이 관련 규정과 성폭력 대책위 조사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을 게재한 것이었다. 이 학생은 “차라리 경찰 조사를 받겠다. 법원 재판이나 피신고인 동의 없이 실명을 공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라고 격하게 반발했다. 그러자 연세대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사법기관도 아니면서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소리냐” “혼자 경찰-검사-판사-집행 다 하는 전제왕권 시대에나 볼 수 있던 절대권력”이라는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실제로도 유명인이 아닌 이상 경찰이나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가해자의 정보를 공개하진 않는다.

학교 측은 “아직 실명을 공개하며 사과문을 게재한 경우는 없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실명을 전제로 한 공개사과 강요나 실명 공개 가능성만으로도 또 다른 인권 침해의 소지는 남아 있다. 그로 인한 피해자의 2차 피해도 우려된다.

 현재 대부분의 대학은 성폭력 사건 처리와 관련해 공개사과 규정을 두고 있다. 하지만 실명 공개 규정은 없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서강대와 홍익대는 공개사과 규정 자체를 삭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성범죄 방지를 위한 대학의 노력이 폄하돼서는 안 되지만 지나치면 탈이 나게 된다.

민경원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