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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업] 상처받고 버려진 도시의 식물, 염중호의 사진이 들여다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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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염중호 작 ‘예의를 잃지 맙시다’, 2012.

식물에게도 사생활이 있다는 걸 입증한 이는 영국학자 데이비드 에튼보로다. 영국 BBC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진 명저 『식물의 사생활』(까치)에서 우리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식물의 성장과 투쟁을 세밀하게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식물의 이데올로기는 어떨까. 식물도 특정 이념을 지녀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까.

 사진작가 염중호(48)씨는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는 길 위에서 만난 식물을 관찰하며 이런 의문을 품었다. 서울 청담동 하이트켈렉션에서 열리고 있는 ‘예의를 잃지 맙시다’는 도시 환경 속에 서식하고 있는 식물이 어떻게 인간 위주의 삶에 적응하고 극복하며 생존하고 있는가를 작가 나름으로 보여주는 협업전이다. 염씨가 찍은 식물 사진을 7명의 작가가 함께 재해석하며 식물의 이념성을 염탐한다.

 대도시에서 식물이 처한 상황은 그들이 때로 인간의 상징으로 보일 만큼 유사하다. 성탄절이 지난 뒤 비닐에 둘둘 말려 길가에 내놓은 트리용 나무는 버려진 시체처럼 음산하다. 전지 작업을 하다 중단돼 괴기한 외모를 지니게 된 화단, 공사장에서 각종 도구에 휩쓸려 존재가 희미해지는 화초, 파인애플을 도려내 만든 화분 등 ‘예의를 잃을 수밖에 없는’ 식물의 존재 방식이 다양한 그림과 작업으로 변주된다.

 작가는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벡(55)의 장편소설 『지도와 영토』에서 식물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보며 공감하게 되어 전시 제목까지 빌리게 되었다. 우엘벡의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이윽고 정적이 흐른다. 오직 바람에 풀들만이 하늘거릴 뿐, 식물의 압승이다.”

 식물은 동물에 훨씬 앞선 피조물, 우주를 만든 별의 첫 친구였다. 식물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그것보다 우주에 더 가깝게 고양된 속성을 지닌다. 염중호 작가의 사진과 7명 작가의 작업이 그걸 이야기한다. 전시는 10일까지. 02-3219-0271.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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