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이게 노골적 보호무역주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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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제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국제무역위원회(ITC)의 구형 아이폰 수입금지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의외다. ITC 판결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1916년 이후 여섯 번에 불과하며, 이번 거부권 행사는 87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이후 26년 만에 처음이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마이클 프로먼 미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거부권 행사는) 미국의 경쟁 여건에 미칠 영향과 미국 소비자에게 미칠 영향 등 다양한 정책적 고려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표준특허는 ‘공정하고 합리적이고 비차별적(Fair, Reasonable And Non-Discriminatory)’으로 사용돼야 한다는 프랜드(FRAND) 원칙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삼성전자와 같은 필수표준특허(SEP) 보유업체의 특허권 남용을 막겠다는 뜻이다.

 우리는 오바마 행정부에 세 가지를 묻고 싶다. 우선 미국은 앞으로도 표준특허에 프랜드 원칙을 적용할 의향인가. 그렇다면 2009년부터 삼성전자에 4억 달러의 로열티를 받아간 미국 특허괴물인 인터디지털의 표준특허에도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게 마땅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표준특허는 다른 특허보다 무효 가능성이 낮고,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핵심 특허다. 애플이 삼성전자에 걸고 넘어진 디자인이나 유틸리티 특허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게 산업계의 상식이다. 이번 거부권 행사는 이런 상식을 정면으로 뒤엎었다.

 둘째로 이번 거부권 행사가 ‘정책적 고려’가 아니라 ‘정치적 고려’ 때문이 아닌지 궁금하다. ITC 결정이 나온 직후 미 상원의원들과 이동통신사들은 USTR에 “아이폰의 수입 금지에 공익을 신중하게 고려해 줄 것을 촉구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번 거부권 행사가 이런 미 정치·산업계의 흐름과 과연 무관한지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결정 과정에서 아이폰4의 새로운 가치가 고려된 게 아닌지 묻고 싶다. 나온 지 3년이 넘은 아이폰4는 당초 수입이 금지되더라도 큰 의미가 없는 낡은 제품이었다. 하지만 올 들어 아이폰4는 마땅한 중저가 스마트폰이 없는 애플에 단단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미 시장에선 이른바 ‘공짜폰’으로, 인도 등 가격에 민감한 이머징 마켓에선 안드로이드 진영의 대항마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아이폰5의 인기가 시들한데도 애플의 스마트폰 판매대수가 꾸준히 느는 비밀도 아이폰4에 숨어 있다.

 우리는 미 행정부가 오는 9일로 예정된 ITC의 판결에도 이번과 똑같이 거부권을 행사할지 지켜볼 것이다. 이미 ITC는 애플의 주장을 받아들여 삼성전자가 애플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예비판정을 내린 바 있다. 이에 대해 미 이동통신사들과 소비자 단체들은 “삼성 제품의 미국 내 수입 금지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잇따라 발표했다. 만약 ITC가 삼성 제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최종 판결을 내린다면 미 행정부는 60일 후에 이를 수용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그때에도 똑같이 USTR이 ‘미국의 경쟁 여건과 소비자에게 미칠 영향’을 들어 거부권을 행사할지 눈여겨볼 것이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대목은 이번 거부권 행사의 배경에 미국의 보호무역주의가 깔려 있는 게 아니냐는 점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이번 결정은 명백하게 자국 기업인 애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더 이상 표준특허로 소송을 걸지 말라는 위협도 담겨 있다. 이런 식이라면 어떤 기업이 땀 흘려 표준특허를 개발하고 기술 혁신에 매진하겠는가. 이번에 ITC는 자유무역의 초석인 지적재산권을 존중한 반면, USTR은 ‘정책적 고려’에 따라 특허권을 무시할 수 있다는 위험스러운 선례를 남겼다. 이런 게 노골적인 보호주의 노선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 세계가 미 행정부와 법원이 잇따라 애플 편들기에 나선 것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