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전쟁…중공의 산아제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중공은 1970년말이면 7억5천7백만의 인구를 갖게 된다. 한때 아무리 많은 인구라도 경제적으로 잘 이용만 하면 잉여생산의 효과를 올릴 수 있으며 아무런 부담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모택동도 이제 인구문제에 공포를 느끼며 산아제한 운동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올해 중공은 모택동의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를 없애려는 강력한 정책추구의 한 부산물인 인구문제를 해결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시도했다.
최근 몇 달동안 북평당국은 도시의 의사들을 징발해서 시골집단농장으로 보내 가족계획운동의 계몽·선전에 종사시키고 있다. 그러나 3백만이 넘는 수다한 집단농장을 모두 순회하기에는 이들의 수는 너무나 적고 또 그 지역이 너무도 넓다.
그래서 당국은 이같은 운동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소위『맨발의 의사들』이라고 부르는 가족계획운동 요원들을 징발에서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중공의 인구문제는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의 경우와 같은 문젯점을 안고 있다.
도시에서는 가족계획운동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시골 농민들의 전통적인 관습에는 잘 먹혀들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인구학자 [레오·올리엔스]박사가 제시한 바에 의하면 1969년말의 중공인구는 7억4천6백만이며 올 4월말이나 5월말이면 7억5천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중공에서 산아제한운동은 1954년에 시작되어 3년간 계속되다가 모택동주의자들이 1958년에 소위 대약진운동을 시작, 광기를 부리면서 아무리 많은 인구라도 잘 이용하기만 하면 전혀 부담이 될게 없다고 주장하자 중단되었다.
[올리엔스]박사에 의하면 1959년부터 1961년 사이에는 대흉작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출산율이 감소되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2년 대약진운동에서 입은 상흔이 회복되자 결혼적령을 정하는등 새로운 산아제한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결혼적령을 여자 25세∼26세, 남자 27세∼28세로 정했다가 나중에는 남자의 경우 30세까지 올려 놓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산아제한운동은 1966년과 67년 소위 문화혁명이 절정에 이르자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1970년대의 사망률을 1천명에 17명으로 계산한다 하더라도 중공은 1975년에는 8억의 인구를 갖게 된다. 【런던·타임즈=본사특약】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