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보복 없는 정치를 바란다|이재학<전 자유당의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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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자유당은 신민당에 통합되었다. 이것은 6·8 선거직후부터 통일야당을 바라는 국민들의 강력한 여망때문에 줄곧 내 가슴속에서 맴돌던 일이었다.
한국에서의 양당제도란 불가능한 일이며 무리하게 이것을 제도화하려는 것은 무식의 소치인 것이다. 왜냐하면 양당정치의 필수적 여건인 정치보복 없는 건전한 풍토가 아직도 아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는 야당의 경우에도 정당이 연합해서 정국을 처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며, 한 정당아래 모이는 것은 내가 평소에 지향하는바 이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통합을 결행한 것은 다음 몇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현 정당법은 사실상 군소정당이 서식할 여지를 거의 완전히 봉쇄하고 있다. 막대한 자금이 드는 지구당 설치에 관한 의무규정은 자유당을 비롯한 군소정당에 사실상 해체든지, 아니면 제1야당에의 흡수든가의 양자택일을 강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당을 해체하는 것은 앞으로도 정치생활을 계속하려는 많은 동지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둘째는, 내 자신이 가장 쓰라리게 경험했던 정치보복의 영원한 추방을 위해서였다. 이번의 자유·신민 통합은 이들의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한국의 정치사에서 보복을 없앨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공명선거와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하나의 선행조건이겠지만, 이번 통합이 갖는바 의미도 여기에 못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통합은 결정되었으나 나의 개인적 거취문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온갖 정렬을 쏟아줬던 동지들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의 재건에 실패한 책임외에 내자신의 연령이 이미 정치활동을 계속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느낌에서였다.
그래서 처음 내가 내렸던 결정은 정치생활을 계속하기를 바라는 동지들에게 신민당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더 주고 나 자신은 조용한 자연인으로 물러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소망은 현실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 판명됐다.
내가 4년전 자유당재건에 나섰던 가장 큰 이유는 이 박사와 자유당에 대한 항간의 오해를 조금이라도 풀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여당을 했던 경험을 살려 국가의 기초마저 흔들어놓는 고질적 여야분쟁의 양상을 어느 정도 정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계산도 있었다.
목전의 이해와 개인적 영단을 떠나 당 재건이라는 고난의 길을 택했을 때 나는 전국의 각지방을 돌아보면서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공화당이나 어느 정당에도 거의 침식되지 않은채 나의 언동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6·8선거에서 국회진출의 꿈은 관권의 개입으로 무참하게 깨어졌고 세론은 단일야당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대국적으로 볼 때 나와 나의 동지들은 이 커다란 흐름에 순응한 것이다.
나는 양당의 통합이 결정된 자리에서 동지들에게『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유당계 운운하는 분파활동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다른 일을 제쳐놓고 특히 이것을 부탁한 이유는 오늘날 신민당이 안고 있는 계파간의 파벌싸움을 우려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복없는 정치사회의 형성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공화당이 구 자유당계 인사들을 끌어 들이는데 항용 쓰는 수법이 구민주당의 정치보복에 대한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란 점은 내가 품고 있는 우려가 결코 노파심만이 아니란 것을 설명해 준다.
나는 이제 이 땅에 종래의 자유·민주 양당의 대립같은 극한상황이 재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의 남은 정렬을 불태울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겸허한 마음으로 그 열매가 영그는 날을 기다릴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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