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의 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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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 60년대는 계획과 수자의 10년. 계획이란 계획은 모조리 등장했고, 그때마다 무수한 수자의 행렬이 둔감해진 시민의 시선을 스쳐 줄달음을 쳐갔다. 그런데도 대개의 계획과 계수는 「강원도 포수」잡이 한번 세상에 나타났다간, 영영 그 족적을 살필 길이 없다. 그러나 가다가는 후문이 있는 것도 있다. 국민학교교실 얘기가 그 예이다.
교실이라고 계획이 없으란 법이 없다. 그래서 의무교육시설확충 5개년 계획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거기 따른 수자도 있다. 70, 71년 두햇동안에 1만4천6백2개의 교실을 새로 만들어서 72학년부터는 2부제를 없앤다는 것이다. 이것이 계획이다. 그런데 72년은커녕, 69년도도 채 가기 전에 벌써 대동시의 땅값이 비싸져 제대로 될 가망이 희박하다는 얘기이고, 더욱 기막힌 일은 그 계획대로 된다고 해도 2부제해소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소위 계획이라는 것과 그 찬란한 숫자의 항렬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다. 못난이가 철학개론을 몇 시간 들으면 앵무새 같이 외기 시작하는 「졸렌」(당위) 과 「자인」(실재)이라는 것을 놓고 볼 때, 우리네가 지난 10년 동안 불철주야 꾸미고 풀고한 그 계획과 수자는 『그래야 한다』는 것이었느냐, 『그랬으면 오죽 좋겠느냐』하는 것이었느냐, 흑은 『꼭 그렇게 되게 하겠고, 될 것이다』란 말이었느냐를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만한 교실이 필요하겠다.』 도는 『그만한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5개년 계획화이라는 숭고한 수식사를 써서 세상에 내놓는 것은 비 윤리이다.
학령아동의 수효나 분포, 땅값과 건책비, 그리고 주머니 속을 모두 정직하게 따지고, 그것을 교육성이라는 대전제에다 겨누어서 천변지리가 없는 한 꼭 이루어질 공산이 있는 것만은 계획하고 숫자를 뽑아내는 것이 상식이다.
한 학급을 60명까지로 못박은 법은 법령철 속에다 모셔두기만 하면 될까. 이상과 현실사이에 큰 격차가 있을때 이상을 계획해서는 안되고 현실을 계획해야 한다. 현실이 어려우면 의무교육 연한을 줄이거나, 돈을 더 많이 투자하는 도리밖엔 없다. 돈 따로, 수요 따로, 계획 따로에 또 교육성도 따로-이것은 너무 비윤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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