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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뉴욕·베를린…마천루에 휘날리는 한국자본 깃발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독일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근처의 38층 규모 갈릴레오 빌딩. 유리 외벽에 사각형 건물이 포개진 듯한 독특한 디자인 때문에 이 도시의 랜드마크 중 하나다. 독일 코메르츠방크가 빌려 쓰고 있는 이 건물을 최근 한국자본이 매입했다. 지난달에 사학연금·현대해상화재보험 등 6곳에서 돈을 모아 4000억원 안팎에 사들인 것이다.

 코메르츠방크의 영국법인이 입주해 있는 건물은 어떨까. ‘런던 시티’에 위치한 연면적 3만7421㎡(약 1만1320평)의 건물인데, 최근 삼성생명이 인수를 추진 중이다. 싱가포르투자청(GIC)이 소유한 이 빌딩의 가격은 약 5700억원. 삼성생명은 4월에도 런던 금융가의 16층짜리 서티크라운플레이스(30 Crown Place) 빌딩을 사들였다.

 국내 투자기관들이 해외 부동산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르고 있다. 올 들어 런던 로프메이커플레이스(약 8000억원 규모), 호주 멜버른 ‘시티웨스트폴리스 콤플렉스’ 빌딩(약 2800억원 규모)을 사들였다. 매입의사를 타진 중인 건물까지 합치면 연말까지 20개 넘는 부동산이 한국자본의 품에 넘어올 걸로 금융투자업계는 내다본다.
 

해외 부동산 투자 열풍은 최근 몇 년 새 불어닥쳤다. 국내 투자기관이 해외 대형 빌딩을 본격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한 건 2009년이 처음이다. 금호종합금융이 그해 5월 뉴욕 AIG 본사 건물 두 채를 1억5000만 달러에 사들였다. 같은 해 국민연금이 6채의 해외 빌딩을 매입하며 국내 시장을 떠들썩하게 했다.

국민연금은 2009년 이후 런던 HSBC 본사 빌딩(2009년), 독일 베를린 소니센터(2010년), 미국 뉴욕의 헴슬리 빌딩(2011년) 등을 비롯해 모두 14채의 빌딩을 매입했다. 이후 주요 연기금과 공제회, 보험사가 앞다퉈 해외 부동산 투자에 나섰다. 지난해 런던에서만 바르톨로뮤레인 오피스 빌딩(한국투자공사·1340억원), 국제로펌 에버셰즈 건물(한화생명·2540억원), 템스코트 빌딩(지방행정공제회·2860억원) 등이 한국자본에 넘어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올 상반기 한국자본은 미국 부동산에 18억3000만 달러(약 2조1000억원)를 투자해 중국을 제치고 아시아 2위 투자국이 됐다. 1위 싱가포르(18억7000만 달러)를 바짝 따라붙었다.
 
미·영 시장의 ‘큰손’ 된 한국자본

기관투자가들이 앞다퉈 해외 빌딩 매입에 나선 가장 큰 이유는 저금리 때문이다. 채권 금리는 갈수록 떨어지고 주식 시장마저 신통치 않으니 연기금·공제회·보험사 등이 대체 투자처를 찾아나선 것이다. 국내 자본이 최근 매입하고 있는 주요 빌딩의 수익률은 보통 연 6% 안팎. 국내 보험사들의 자산 운용수익률이 평균 4%대인 걸 감안하면 쏠쏠한 편이다.

김정연 하나다올자산운용 이사는 “안정적인 운용을 중시하는 연기금·보험사 등은 장기 임대계약을 맺은 입지 좋은 빌딩을 선호하는 편”이라며 “부동산 펀드에 비해 위험은 크지 않고 시장이 좋아지면 시세 차익까지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것도 매력 포인트”라고 말했다.

연금 규모가 커지는 것도 한몫한다. 국민은행 기금운용본부 관계자는 “투자금액이 커지면 기존 펀드상품을 통해 분산투자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연기금 규모가 커지면서 투자 다변화 필요성이 커지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미국 최대 연기금인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은 부동산 투자 비중이 8~10%에 달한다”고 소개했다. 지난 6월 기준 국민연금의 해외 부동산 투자금액은 10조1265억원. 2008년(5642억원)과 비교하면 18배로 늘어났지만 전체 적립금 대비 투자 비중은 아직 2.5%에 불과하다.

1997년 외환위기의 상처가 최근 투자 확대의 발판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외환위기 당시 값이 폭락한 국내 상업용 빌딩이 해외 자본에 무더기로 팔렸던 쓰라린 기억을 바탕으로 기관투자가들이 “위기란 부동산을 살 기회”라는 교훈을 얻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유럽의 부동산 가격은 크게 떨어졌다. 2009, 2010년 발 빠르게 빌딩을 매입한 투자기관은 적지 않은 시세 차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연금은 2009년 사들인 런던 중심가의 88우드스트리트 건물을 올 4월 매각해 17.5%의 수익을 냈다. 신준현 현대자산운용 이사는 “시장이 바닥을 쳤던 2009년 발 빠르게 투자한 국민연금 등은 안정된 임대료 외에 시세 차익도 적지 않게 거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가격 매력 하락 … “장기 투자 염두에 둬야”

문제는 선진국 부동산 시장이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며 빌딩 가격이 많이 오른 데다 신흥국의 투자 열풍이 맞물려 수익률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기껏 매입한 빌딩이 빛 좋은 개살구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정연 하나다올자산운용 이사는 “투자심리가 회복되지 않았던 2010년까지만 해도 시세 차익을 기대할 만한 물건도 꽤 있었지만 최근엔 빌딩 몸값이 많이 올라갔다”며 “런던·뉴욕 등 인기 지역의 부동산은 최근 임대수익률이 4%대 후반에 불과할 정도로 가격이 오른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대형 부동산은 팔고 싶을 때 쉽게 팔 수 있는 자산이 아닌 만큼 장기 투자는 기본이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안정적인 수익을 노린다면 최소 7년 이상을 내다보고 투자해야 한다”며 “펀딩 기간이 너무 짧으면 시장 상황에 따라 손실을 보고 매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선진국 쏠림현상은 당분간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게 시장의 관측이다. 신준현 이사는 “신흥국 부동산의 경우 시세 차익 등에서 기회가 많긴 하지만 소유권이나 금융 인프라 등 장애물도 만만치 않다”며 “안정적인 임대 수익을 노리는 기관투자가라면 선진국의 입지 좋은 부동산을 선택하는 게 더 낫다”고 권했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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